작아서 좋다고 해줘요, 아이폰SE

입력 2016-05-0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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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이폰SE를 뜯어보겠어요. 다들 잘 알고 계시는 그 아이. 4인치 아이폰말이에요.

이미 지난 3월에 애플 신제품 발표회 현장에서 짧은 첫만남을 가지긴 했지만, 그땐 좀 서먹했죠. 이제 좀 더 친해질 시간이에요.

어렵게 설명하지 않을게요. 이 제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들을 조합해놓은 ‘리사이클 아이폰’이에요. 아이폰6s와 똑같은 A9 프로세서로 구동되며, 아이폰5 시리즈와 똑닮은 크기와 디자인이죠. 익숙한 것들이 모여 낯설어졌어요. 여러분의 지나간 여자친구를 떠올려보세요. A는 얼굴이 예쁘고 아담한 체구였죠, B는 똑똑하고 자상했어요. 그런데 A의 얼굴을 하고 B처럼 행동하는 새 여자친구 C가 등장한거에요. 여기까지만 보면 완벽한 드림걸이죠.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의 취향이 분열하기 시작해요. A를 만났을 땐 작고 아담한 여자가 좋았지만, 이제 난 키 큰 여자가 좋은데? 우리 사이가 예전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한때는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4인치 스마트폰을 간만에 오른손에 꽉 쥐어봅니다. 일단은 예쁘네요. 아이폰5s와 판박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마감 방식에 여러 변화가 있습니다.

아이폰5 실버 모델과 나란히 두고 비교해볼까요? 반짝이는 광택을 자랑하던 모서리의 다이아몬드 커팅이 아이폰SE에서는 매트하게 처리됐어요. 전처럼 블링블링한 맛은 떨어지지만, 조금 더 시크하고 정돈된 느낌이네요.

뒷면의 애플 로고 역시 아이폰6 시리즈처럼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마감했습니다. 사족이지만 빈틈 하나 없이 꼭 맞게 마감된 아이폰의 애플 로고야말로 이 제조사가 가진 병적인 결벽증의 상징이죠. 아이폰SE와 아이폰5s 스페이스 그레이로 비교해 보았는데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가장 큰 차이는 역시 로즈 골드죠. 애플이 야심차게 밀고 있는 핑크 컬러…가 아니라 로즈 골드는 기가 막히게 예뻐요. 아이폰6s보다는 아이폰5s의 디자인과 궁합이 더 잘 맞는 것 같네요. 이제야 컬러가 알맞은 옷을 찾았달까요?

사실 이 모든 변화는 미묘해요. 실제 구입해 사용하는 사람들만 내 제품이라는 애착을 가지고 뚫어져라 쳐다봤을 때 깨달을 수 있는 변화죠. 하지만 남들은 잘 몰라도 내 눈에만 예쁘면 되니까 괜찮아요. 개인적으로 컬러는 반드시 로즈 골드여야해요. 사람들이 내가 아직도 구형 아이폰5s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곤란하니까요. 저는 얼리어답터인데.

껍데기에 대한 얘기는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 같으니, 이제 아이폰SE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 제품을 두고 말이 많았어요. 보급형 아이폰이나 저가형 아이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사실일까요? 아이폰SE는 언락폰 기준 16GB 모델이 59만원, 64GB 모델은 73만원입니다. 아이폰치고는 겸손한 가격이지만, 다른 제조사의 보급형 제품과 비교하면 부담스러운 가격이죠. 플래그십 이라고 부를 이유도 없지만, 보급형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스펙을 볼까요? 아이폰SE는 아이폰6s와 95% 정도 같은 성능을 제공합니다(빠진 5%는 애플 로고의 한 입 베어 문 빈자리 같은 것인데 잠시 후에 얘기하기로 해요). 아이폰SE에 탑재된 A9 프로세서는 아이폰6s의 그것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모션 보조 프로세서인 M9도, 후면 iSight 카메라의 성능과 기능도 모두 그대로 녹아있죠. 이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에요. 모든 제조사가 ‘큰 화면은 하이엔드, 작은 화면은 저가형’이라는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애플 혼자서 대세를 거스르는 제품을 내놨으니까요.

아이폰SE를 사용해보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화면 크기와 디자인은 3년 전에나 사용하던 아이폰5s의 그것인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최신 모델인 아이폰6s와 똑같으니까요.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빠르다니. 뭔가 반칙 같은 느낌이랄까?

이상한 기분이 드는 현재 아이폰6s를 사용 중인 저 뿐만이 아닙니다. 아이폰5s 이전 세대의 구형 아이폰을 사용하는 지인들도 아이폰SE를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고 하네요. 화면을 합성해 놓은 것 같은 그런 기분요.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디자인인데 반응 속도나 작업 처리 속도가 현저히 다르니까요.

이게 바로 아이폰SE의 강점입니다. 오래된 디자인과 오래 전에 사랑받던 크기에 가장 최신의 프로세서를 넣은 것. 가장 강력한 4인치 아이폰이라는 애플의 표현이 딱 맞는 거죠. 고작 3년 전을 오래전이라고 표현하긴 머쓱하지만 이 업계가 워낙 빠르니까요.

사실 모든 사람이 아이폰SE를 원할 리는 없습니다. 대화면 스마트폰은 전세계적인 트렌드이고, 애플이 아이폰6 시리즈 출시 이후 판매량을 껑충 끌어올린 것도 이런 트렌드를 적극 반영한 덕분이죠. 아이폰SE는 정반대입니다. 여태까지 존중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숨은(?) 취향을 대변합니다. 대화면 스마트폰의 쾌적함을 사랑하는 사람도 많지만, 여전히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폰을 원하는 사람도 많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주변을 살펴보면 4인치 이상 화면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구형 아이폰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니까요.

이런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 화면 전체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는 아이폰5 시리즈의 손맛에, 아이폰6s의 성능을 더한 제품의 등장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겠죠. 그러니까, 저가형 아이폰이 등장했다기 보다는 아이폰6s 옆자리에 4인치 스마트폰이라는 선택지가 추가됐다고 이해하는 게 빠르겠습니다.

아이폰SE의 성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이폰6s에 특화된 게임을 플레이해보았습니다. ‘AG Drive’는 일종의 레이싱 게임으로 단순한 조작법으로 뛰어난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미래도시를 질주하는 비행선의 움직임은 시원스럽기 그지없죠. 킬링 타임으로 딱 좋으니 다들 한번 해보시길. 여튼, 이 게임은 초당 60프레임의 매끄러운 그래픽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단순한 게임 같지만 화면을 끊김 없이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기기 성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얘기죠.

아이폰6s와 아이폰SE로 번갈아가며 AG Drive를 플레이해보니 화면 크기만 달라졌을 뿐, 똑같은 조작감을 제공합니다. 매끄럽고, 빠르고, 쾌적하네요. 참고로 아이폰5 시리즈에서는 같은 느낌으로 플레이할 수 없답니다.

배터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이폰SE의 큰 장점 중 하나인데요. 바디가 작으니 배터리 용량도 아이폰6s보다 떨어지건만, 실제 배터리 사용시간은 대동소이하거나 조금 앞선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사용해보고 다시 알려드리겠지만 예전 아이폰5s 시절보다 배터리 효율이 눈에 띄게 좋아졌음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A9 프로세서의 효율이 구형 프로세서보다 훌륭하기 때문이죠.

이런 배터리 자신감(?)은 아이폰SE의 ‘시리야’ 기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원 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리야’하고 부르면 응답하는 그 기능말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언제든 사용자의 목소리를 포착할 수 있도록 백그라운드에 마이크가 활성화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배터리 효율이 보장되지 않으면 탑재할 수 없는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어떨까요. 화면이 작아지긴 했지만 4K 비디오 촬영도, 파노라마 촬영도, 심지어 라이브 포토 기능까지 동일하게 녹아있습니다. 1200만 화소의 후면 카메라는 아이폰6s와 완전히 똑같죠. 더 작은 화면에서 사진을 확인하게 되지만 확대해서 디테일을 확인해보면 제가 알던 그 카메라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이제 슬슬 작은 함정(?)이 드러나는데요. 앞서 얘기했던 한 입 베어먹은 사과, 5%의 부족함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폰SE의 전면 카메라는 120만 화소로 아이폰6s의 500만 화소 카메라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건 실제로 사진을 촬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아이폰5s를 사용할 때만 해도 전 20대였는데, 간만에 저화질 페이스타임 카메라로 셀카를 찍으니 20대로 돌아간 것처럼 주름이 뭉개져 보이네요. 하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 밖에도 미묘한(?) 5%의 차이는 몇 가지 더 남아있습니다. 아이폰SE에는 1세대 터치 ID 센서가 들어가있죠, 기존에 아이폰6s의 2세대 터치 ID에 길들여진 저로서는 섭섭한 부분입니다. 3D 터치를 지원하지 않는 다는 점도 아이폰6s와의 차이 중 하나입니다. 디스플레이의 밝기에도 두 제품 간에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네요. 개인적으론 128GB 모델이 없는 것도 아쉽구요.

아이폰SE는 정말 묘한 제품입니다. 아이폰 시리즈의 출시 주기와도 맞지 않고 번외판으로 불쑥 등장했죠. 가장 작지만, 가장 강력한 성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아이폰6s 만큼 완벽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화면이 작은 기기를 선호한다는 이유로 울며 겨자먹기로 저성능 제품을 선택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훌륭한 대안이 되겠죠.

계속 언급했지만 저는 아이폰6s를 사용 중입니다. 아이폰SE를 사용하며 불편함과 쾌적함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간만에 손에 쥔 4인치 아이폰은 목업처럼 가볍고, 짧은 내 손가락으로도 아름답게 터치하고 조작할 수 있더군요. 하지만 출퇴근길의 모바일 쇼핑이 삶의 낙인 저에게 4인치 화면은 비좁은 쇼윈도였습니다.

결국 세상 모든 제품이 그러하듯 이 아이도 취향의 문제입니다. 아이폰6s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존의 제품을 포기하고 아이폰SE로 건너 탈 이유는 없어요. 가장 많이 팔리는 아이폰이 될 리는 없다는 얘기죠. 하지만 작고 성능 빠릿한 스마트폰이 없어서 ‘구형폰의 섬’에 갇혀있던 사람들에겐 구세주가 될만한 모델입니다. 이건 아이폰 사용자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대형 스마트폰으로 즐비한 안드로이드 진영의 사용자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아이폰SE는 안드로이드에서 iOS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허들을 낮출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모두에게는 아니고 니즈를 가지고 있던 사용자들에게 말이에요.

정리하자면 간단합니다. 예쁘고 작은데, 성능도 훌륭합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현재로썬 시장에 경쟁자가 없는 제품이죠. 4인치의 고성능 스마트폰은 아이폰SE 뿐이니까요. 자, 이제 낯선 여자 같기도 하고 구여친 같기도 한 아이폰SE를 더 즐겨보러 떠납니다. 제 습관은 어떻게 바뀔까요.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얘기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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