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향후 그룹 지배구조가 어떻게 개편될지 재계의 관심을 끈다.
사업 재편 및 승계 구도와도 밀접하게 맞물리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삼성은 2013년 하반기부터 지속적으로 사업구조를 뜯어 고쳤다. 계열사끼리 쪼개고, 떼고, 붙인 데 이어 한화와의 '빅딜'도 실행했다.
4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의 공백과는 별도로 최근 SK, 한진, 대림 등 다른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삼성도 지주사 전환 전략을 비롯해 '큰 그림'을 그릴 때가 다가온다는 관측이 나온다.
아울러 오너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인 제일모직과 삼성SDS의 상장 후 보호예수기간(6개월) 만료를 앞둔 시점도 지분 변화를 포함한 여러 추측을 낳게 한다.
◇ 잇단 합병과 상장…순환출자 고리 단순화
근래 삼성 사업구조 재편의 시발점은 2013년 9월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 인수 결정으로 볼 수 있다. 그해 연말까지 삼성SDS의 삼성SNS 흡수합병, 에스원의 삼성에버랜드 건물관리사업 인수, 삼성에버랜드의 급식·식자재 사업 분리와 삼성웰스토리 설립 등 일련의 작업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굵직한 계열사 합병·상장이 진행됐고 석유화학·방산부문 빅딜로 방점을 찍었다.
작년 3월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 발표에 이어 삼성SDS가 상장을 공식화하고 6월에는 삼성에버랜드의 상장 계획이 발표됐다. 삼성에버랜드는 지난해 7월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바꿨다.
지난해 11월 말에는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등 4개사를 한화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유일하게 실패한 재편 작업이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다.
주주들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규모가 예정 한도액을 초과하면서 작년 11월 합병이 무산됐다. 최근 합병을 재추진한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거래소의 조회공시 요구에는 "합병 재추진 계획이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삼성그룹 여러 계열사에 30개가 넘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던 순환출자 고리는 현재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전기·삼성SDI→제일모직'으로 단순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 지주사 시나리오 고개 드나
최근 SK그룹은 SK㈜와 SK C&C를 합병함으로써 '옥상옥 지배구조'를 해소했다. 대림은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I&S의 합병으로 3세 경영을 본격화했다. 한진그룹 지주사 한진칼은 정석기업과의 합병을 결의해 총수일가의 수직 지배구조를 만들었다.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지주사 전환 시나리오로 삼성전자를 인적분할해 삼성전자 투자회사(홀딩스)와 사업회사로 나눈 뒤 삼성전자 홀딩스와 상장한 제일모직이 합병해 삼성지주사를 출범시키는 것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본다.
삼성 관계자는 그러나 "지주사 전환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데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미온적 반응을 보였다.
그룹 차원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지주사 전환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주사 체제가 승계구도 구축에 가장 안정적이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자사주를 대거 매입하는 것도 주주 친화정책을 추구하는 동시에 '지주사 전환 포석'이라는 해석이 있다.
삼성전자는 전체 지분의 1.12%를 추가 취득하는 매입 작업을 끝내면 자사주 비중을 12.21%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자사주는 일반적으로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한다.
자사주는 통상 의결권에 제한을 받지만 삼성전자가 인적분할 이후 자사주를 투자회사에 귀속시키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지주사의 마법'이라고 불리는 대목이다.
거래소 간담회에서 삼성전자 주식의 액면분할 가능성이 언급된 것도 주가 부양과 지주사 전환에는 긍정적인 사인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선 삼성전자 홀딩스와 사업회사의 분할 비율을 2대8,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홀딩스의 합병비율을 1대3 정도로 관측한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제일모직의 기업가치가 충분히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제일모직은 주주구성상 특수관계인과 우호지분이 절대적이어서 주식매수청구권 이슈가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간 금융지주사 체제
국회에는 금융지주회사 관련 법안이 현재 걸려 있다. 정부에서도 '(금융지주법은) 안 해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사 법 통과가 되지 않더라도 제조 부문과 금융 부문으로 나눠 각자 지주회사 체제를 운영하는 것도 삼성그룹의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제조 부문은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홀딩스의 합병회사가 지주사를 맡고, 금융 부문에서는 삼성생명이 삼성화재와 더불어 금융지주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물론 관련 법이 통과되면 중간 금융지주사를 출범시킬 수도 있다.
아울러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가 꾸준히 입법 요청을 하는 '원샷법'(사업재편 지원법)도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원샷법은 상법·세법·공정거래법을 단일 패키지로 묶어 한번에 통과시키는 게 골자다.
◇ 삼성SDS 지분 처분할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0.57%에 불과하지만 제일모직에는 23.24%, 삼성SDS에는 11.25%의 지분을 각각 갖고 있다.
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 사장은 제일모직 지분 7.75%, 삼성SDS 지분 3.90%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삼성SDS는 오는 14일, 제일모직은 다음달 18일로 의무 보호예수 기간이 끝난다. 의무 보호예수란 인수·합병·유상증자가 이뤄진 기업의 소액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주주 등이 일정기간 보유지분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한 제도다.
6개월이 지나면 보호예수가 풀려 지분을 처분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삼성SDS 지분을 팔아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 핵심 계열사 지분율을 늘릴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전혀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게 삼성 측 반응이다.
제일모직의 경우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고, 지주사 전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회사라서 삼성SDS와는 사정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