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는 1957년 일본 지바현 후나바시 시에서 육상 자위대 제1 낙하산 부대 대원이던 부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꿈은 유명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를 동경해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 일본 명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1985년 마쓰시타정경학원 1기생으로 졸업하면서 그의 진로는 정계와 더 가까워진다.
마쓰시타정경학원 졸업 후 가정교사와 도시가스 검침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사설 교육상담소의 소장과 청년 정치기구 부간사장을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꾸게 됐다.
이같은 경력에 힘입어 그는 1987년 29세의 나이로 지바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최연소 의원에 당선됐고, 1993년 일본신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다.
1986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20년간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지역구 전철역 앞에서 거리연설을 계속한 점은 이미 잘 알려진바다.
이 때부터 ‘연설은 민주당 내 최고’라는 평을 받았고, 29일 당 대표 경선에서도 어릴 때 경험이나 국회의원 낙선시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고, 국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호소해 표를 끌어모았다.
신진당을 거쳐 2000년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고, 이후 마쓰시타정경학원 후배인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상과 힘을 합쳐 당 세대교체 흐름을 주도해왔다.
2002년 9월에는 당 대표 경선에 직접 출마했고, 2005년 9월 경선에선 마에하라를 대표에 당선시키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민주당에서는 간사장 대리와 국회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2009년 9월 민주당 정권 출범시 재무성 부대신을 거쳐 지난해 6월 간 나오토 내각에서 재무상이 됐다.
역사 인식이나 정치 성향은 ‘민주당 내 우익’에 속한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한국·중국 등의 반발을 샀을 때 ‘A급 전범은 일본 내에서 이미 사면됐으니까 더이상 전범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질문한 적이 있고, 지난해 1월 민주당 한 모임에서 “외국인이 참정권 원하면 귀화(일본 국적 취득)하라”고 말했다.
영토 문제에 민감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야 한다’거나 ‘안전보장기본법과 긴급사태법을 만들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초당파 헌법조사추진의원연맹에도 속해있다.
마쓰모토 다케아키 외상과 마찬가지로 하루 2갑을 피우는 애연가지만 담배 증세에 앞장섰다. 애주가이기도 하다. 유도 2단이고, 취미는 격투기 관전. 초당파 의원연맹인 격투기 진흥 의원연맹 회장이다.
성격은 온화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