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을 때는 뭐든 다해주고 싶고, 싫을 땐 아무것도 해주기 싫은 법이다."
가사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한 변호사의 말이다. 사랑했던 부부사이도 애정이 식고, 이혼을 준비할 때가 되면 법적 분쟁의 상대로 남는다.
최근에는 해외 유명인들이 이혼을 대비해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미리 정해놓는 사례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혼전 계약'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지난 해 말 한 결혼정보 업체가 미혼남녀 782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54%, 여성의 63.2%가 '혼전계약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혼전계약서 내용이 실제 효력을 보는 경우는 드물다. 관련 근거규정도 없고, 법원도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혼전계약서 내용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고령화되고, 이혼률도 올라가면서 혼전계약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인정할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 관심에 비해 아직은 갈 길이 먼 '혼전 계약'
해외사례가 소개되며 명칭도 익숙한 '혼전계약'은 막상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혼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 '윈'의 이인철 변호사는 "초혼을 앞둔 젊은이들의 경우 전화문의를 하는 일은 가끔 있지만, 직접 찾아와서 계약서를 작성한 적은 없다"고 전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다른 가사사건 전문 변호사 3명도 초혼을 앞둔 결혼 당사자들이 이혼에 대비해 혼전계약을 하거나, 이혼사건에서 혼전계약서를 제시한 사례를 접하지 못했다고 했다.
법원이 효력을 인정한 사례도 거의 없다. 가사 전담 법관으로 일하다 변호사로 개업한 법무법인 '지우'의 이현곤 변호사는 "이혼을 전제로 재산분할에 관한 사항을 미리 정하는 계약이 유효한지, 유효하다면 어디까지 효력이 인정되는 지에 관해 판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2000년 2월 '이혼하기 전에 미리 재산분할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은 성질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이후 같은 취지의 판결이 몇차례 반복됐을 뿐, 혼전계약서 내용을 직접적으로 인정하거나 부인한 사례가 없다. 이혼소송에서 혼전계약의 효력을 인정할 지가 쟁점인 사건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혼전계약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 아무도 반기지 않았던 혼전 계약
사실 혼전계약은 우리 사회에 정서상 익숙한 존재는 아니다. 혼전계약이 활성화한 영미계는 결혼이 개인과 개인의 결합의 성격이 강하고, 결혼 후에도 재산을 각자 관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고, 결혼하면 재산을 섞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이혼을 금기시해 온 것도 '이혼을 전제로 하는' 재산분할계약이 자리잡지 못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변호사들도 혼전 계약을 반기지 않는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혼전계약이 좋은 게 아니에요. 변호사 사무실 와서 혼전계약서 써봐야 비용을 얼마나 내겠어요. 몇십만원, 재산규모가 크고 복잡하면 몇백만원 정도에요. 이혼소송에서 다툼이 생겼을 때가 변호사 입장에서는 이익이죠." 서초동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한 변호사의 말이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법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가 돼보니 판사들은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느꼈어요. 재산분할만 해도 그래요. 그동안 법원이 인정해온 비율이 있는데, 그걸 벗어나는 혼전계약 내용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죠." 그는 대법원에서 판례를 남기지 않는 한 하급심에서 새로운 판결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 법적 근거도 명확치 않아
상속법분야 전문가인 법무법인 태평양의 임채웅 변호사는 "우리나라도 혼전 재산분할 계약을 체결하고, 내용을 등기할 수 있는 것처럼 알린 보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상당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 변호사는 우리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부부재산 약정'은 혼전계약과는 무관한 조항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민법 829조는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재산관계에 관한 사항을 미리 정할 수 있도록 근거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조문은 '결혼 중' 재산관계를 정한 것일 뿐, 혼인이 종료되면 적용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임 변호사의 설명이다. 가족법 분야의 대가인 김주수 교수도 저서를 통해 같은 취지로 설명한 바 있다.
■ 그래도 필요한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조인들이 우리 사회에 혼전계약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재혼' 때문이다. 이혼률은 올라가고 사회가 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혼 인구가 늘어나게 되는데, 재산문제가 새출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혼일 때는 이혼을 전제로 한 혼전계약에 대한 정서상 거부감도 있고, 보유재산이 적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재혼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 결혼하더라도 이혼할 때의 힘든 과정을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재혼할 때 쯤이면 보유 자산의 규모도 어느 정도 있는 상황이다.
재혼자가 자식이 있는 상황이면 혼전계약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이혼할 경우 새로운 배우자가 어느정도의 재산을 가져가게 될 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혼을 생각하는 배우자 입장에서도 결혼상대의 자녀들과 골치아픈 상속분쟁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미리 재산분할 관계를 정해놓는 게 마음이 놓일 수 있다.
■ 현재 혼전계약의 의미
임채웅 변호사는 "혼전계약이 원래 의도하던 데로의 효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특유재산을 인정받는 데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유재산이란 부부 일방이 혼인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산이거나,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혼할 경우 재산분할은 7:2로 한다'는 계약서는 법적 효력이 인정될 지 불확실하지만, '이혼할 경우 다이아몬드 반지는 부인의 소유로 한다'는 약정은 이혼시 일방의 재산으로 인정되는 데 도움이 된다.
이현곤 변호사도 "협의이혼에서 부부간 약정은 재판상 이혼에서 효력이 온전히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라고 조언한다. 양쪽이 합의 하에 원만하게 이혼할 때 재산을 어떻게 나눌 지 미리 정해놓은 계약이 강제로 이혼하는 경우에도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는 있다는 설명이다. 이 경우 혼전계약서의 진위가 재판에서 문제될 수 있으므로, 혼전계약서 내용에 상대방이 동의했다는 흔적을 남겨놓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변호사를 찾아가 공증을 받아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인철 변호사는 "'이혼시 재산분할을 아예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상대방의 권리관계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내용은 오히려 무효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