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블 카렐과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댄 인 러브(Dan In Real Life)>를 오늘 처음 봤다. 하지만 손드르 레르케(Sondre Lerche)의 <댄 인 러브> OST는 200번 정도 들었다. 좋은 영화음악을 영화보다 먼저 접하면 간혹 이럴 때가 있다. 지나친 환상으로 인해 영화를 보기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특히나 <댄 인 러브>는 그랬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런 편견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괜한 편견에 갇힌 원칙주의자처럼 쓸데없이 영화를 피해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인공 댄이 고향으로 출발하는 장면에서 2번 트랙 'To Be Surprised'의 낯익은 레르케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는 너무 감격스러워 하마터면 울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200번 이상 들으며 상상만 했던 OST가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흘러나오는지 처음 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댄 인 러브>에 삽입된 손드르 레르케의 음악은 1인칭이다. 단순히 영화의 배경음악이 아닌 주인공 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고지식하고 소심한 댄을 대변하는 단선율의 멜로디는 외로운 댄과 닮아있다. 특히 댄과 마리의 테마곡인 4번 트랙 'Dan and Marie Picking Hum'의 기타 선율이나 모두가 댄을 향해 문을 닫을 때 나지막히 울리는 1번 트랙 'Family Theme Waltz'의 트럼펫 선율은 마치 댄 그 자체인 듯 구슬프다. 우스꽝스럽고 단순한 멜로디가 심금을 울리는 이유다.
우리네 대가족도 그렇듯, 비밀 없는 가족들의 관심과 집중은 대체로 이기적일 때가 많다. "댄이 누군가를 다시 사랑한 적이나 있었냐?"는 가족들의 물음은 당사자인 댄에게 비참한 고독감을 준다. 막내딸 릴리의 말처럼 댄은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제외된 사람'이다. 4년 전 부인을 잃은 후로 말이다. 이것이 그 이후에 나오는 14번 트랙 "Let My Love Open the Door"를 슬프게 만드는 이유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줄 정말 몰랐다.
처음 <댄 인 러브> OST를 들었을 때 '이렇게 사랑스러운 영화음악이 또 있을까?' 싶었다. <댄 인 러브>에 수록된 음악과 쓰인 악기들은 모두 사랑스럽다. 그러나 악기보다도 더 말랑말랑한 것은 손드르 레르케의 목소리다. 그는 비슷한 또래 뮤지션인 제이슨 므라즈보다 클래식하고 존 메이어보다 소프트하며 데미안 라이스보다 희망적이다. 그러면서도 더 풋풋하고 여유롭다. 레르케는 통기타 하나로 영화 한 편을 채우는 것쯤은 충분하다는 듯 시종일관 여유 있는 피킹과 호흡으로 <댄 인 러브>를 끌고 간다.
레르케는 <댄 인 러브> 외에 6장의 정규앨범과 다수의 싱글앨범을 냈다. 12번 트랙 'Human Hands'와 같은 곡들은 훗날 레르케가 재즈밴드를 꾸린 것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2012년 발표한 5집 'Duper Session'에서 레르케는 포크 소년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나비 넥타이와 검정 지팡이로 한껏 치장한 파티장의 나이스한 재즈보컬로 변신한다. 그 이름도 거창한 'Sondre Lerche & The Faces Down Quartet'이다. 조금 어설퍼도 이해한다. 이제 겨우 33살이니까.
참, 혹시 영화 <댄 인 러브>를 보다가 레르케가 궁금해졌다면 엔딩 크레딧을 놓치지 말 것. 댄과 마리의 결혼식 뒤로 검은 정장을 입고 노래하는 레르케가 보인다. 물론 착한 사람들 눈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