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교수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안정된 교수 자리를 박차고 프랑스로 향했으며, 이후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미국으로 가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30년간 해외에서 생활했다. 그는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다른 일에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오로지 지적 탐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하며 학자와 시인의 삶을 살아왔다.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나는 젊은 시절부터 삶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궁극적, 즉 형이상학적 신비를 캐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사춘기 이래로 그의 삶은 지적 투명성, 감성적 열정 그리고 도덕적 진실성 세 가지 축 위에 우뚝 서게 된다.
이성주의자 칸트를 좋아하는 그는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학문 세계와 인생을 구축해 왔다. 이런 점에서 그를 대표적 인본주의자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책을 읽다 만난 흥미로운 내용 가운데 하나는 박 교수의 종교관이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은 이성이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의 잣대는 양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성의 가르침에 따라 곧게 살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 옳게 사는 것 말고 다른 의미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박 교수는 세계는 오로지 인간의 세계이며,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존재의 객관적 속성에 대한 언급을 자기당착이라고 믿는다. 자연스럽게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자는 표현을 달리하더라도 지향하는 목적지는 엇비슷하다. 박 교수의 “나는 궁극적으로 종교나 정치보다 앎에서 하나님같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갖고 살았습니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어떤 사람은 앎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돈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명성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저자인 정수복 교수는 박 교수를 두고 젊은 시절부터 인생에서 목숨을 걸 만한 그 무엇을 찾아온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학문과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박 교수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라는 책의 제목이 작가의 치열한 생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은 허무하나 인생은 허무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결단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라는 고백이 여운을 남긴다. 대개 이성과 합리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광대한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비슷한 결론을 얻게 되는가 보다. 원로 학자에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비춰질까.
“이성적 사유능력의 부재, 즉 독립적이고 자율비판적 사유의 부재가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혼란과 혼동의 원인이다. 그에 따른 전통의 근원적 원인은 한국인의 이성, 즉 독립적 사고능력의 부재 내지는 결함에서 찾아야 한다.”
원로의 삶에서 내 삶과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