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속으로] 가상 현실의 시대,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입력 2020-02-12 18:06 수정 2020-02-1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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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이삿짐을 정리하다 큰아이의 돌잔치 비디오테이프를 찾았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는 오래된 순수의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화면 속 나와 가족들은 행복해 보였고, 들떠 있었다. 영화처럼 흘러가는 장면들은 그때 그 장소에 나를 있게 했다. 낡은 캠코더 덕분에 떠올린 행복한 순간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 재롱으로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돌잡이 장면에서 잠시 화면을 멈췄다가 돌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활짝 웃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이 앞에 연필과 1만 원권을 은근히 밀어 놓으셨는데, 아쉽게도 우리 아이는 활을 잡고 만세를 불렀다. 그 아이는 이제 현역이 아닌 공익 입대를 앞두고 있다. 장군으로 대성할 거라는 돌잡이의 예언은 빗나갔다.

1973년 등장했던 1만 원권은 부의 상징이었다. 5만 원권이 나온 뒤 고액권의 지위를 양보했고, 이제 10만 원권 신권이 거론된다. 널리 쓰이던 동전도 주변에서 사라지고, 돼지저금통도 잘 안 보인다. 거스름돈의 번거로움 때문인지 현금을 내면 반가워하지 않는다. 현금 없는(cashless) 사회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제 경조사에 모바일로 돈을 보내는 일이 낯설지 않은 시대이다. 금·은과 같은 귀금속 화폐의 지위를 대체한 것이 지폐였지만, 지폐 자체는 가치가 없다. 종이에 숫자만 적혀 있을 뿐이다. 종이가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신뢰, 바로 중앙은행이 뒤에 있기 때문이다.

2020년 2월 4일 한국은행은 ‘디지털화폐연구팀’을 발족했다. 올해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추진을 공식 발표한 중국인민은행에 이어 유럽 각국의 중앙은행도 CBDC 조직을 꾸리고, 미국의 연준마저 신중한 입장에서 벗어나자 한국은행도 변화에 동참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미 스웨덴에서는 현금을 사용하기 힘들고, 유럽중앙은행(ECB)은 2018년 이후 1000유로 이상의 고액 현금거래는 금하고 있다. ‘와!’ 하고 놀랄 이유는 없다. 우리 주변에도 이미 전자화폐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해피포인트, 카카오페이도, 제로페이도 전자화폐이다. 지폐와 동전은 퇴장되고 있다. CBDC란 용어가 생소할 뿐이다.

금융위기 이후 돈을 풀어도 인플레이션은 출현하지 않았다. 미국의 연준은 양적 완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활용하고, 유럽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적용했지만 글로벌 경제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올리비에 블랑사르와 폴 크루그먼 같은 석학들의 지적대로 ‘구조적 장기 침체’의 가능성도 여전하다. 만성적 수요 부족이 원인이다. 문제는 수요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 수단을 이미 쓸 만큼 썼다는 데 있다. 부채는 과다하고, 재정 정책 여력은 제한적이다. 기술혁신은 일자리를 늘리기보다 오래된 직업을 대체하고 있다. 아마존과 구글이 가져온 기술 혁명의 실체다. 이 둘의 복합작용으로 구조적 저금리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가장 흥미롭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양적완화(QE) 이후의 지급준비금이다. QE를 통해 아무리 돈을 풀어도 인플레이션도, 달러 약세도 출현하지 않았다. 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금리라는 일종의 벌칙금을 부과하면서까지 민간 은행의 돈을 중앙은행 밖으로 내몰려 했지만, 돈은 돌지 않고, 중앙은행에 머물러 있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지급준비금에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분류로 지급준비금 역시 CBDC이다. 민간은행과 중앙은행 간의 거래는 지폐나 동전 없이 디지털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민간은행은 바로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으로 저금했기에 돈은 돌지 않았고, 인플레이션이 출현하지 않았다. 연준은 화폐를 직접 통제할 수 없다. 돈 자체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급준비금을 조절할 뿐이다.

구조는 서울시의 제로페이와 다르지 않다. 왜 서울시는 제로페이를 하려 하는가? 제로페이는 서울시에서 보장하는 화폐, 다른 말로 서울시가 발행하는 돈이다. 제로페이를 통해 서울시는 국가부채에서 자유로워진다. 지금까지 화폐와 국채의 차이는 단순했다. 정부는 국채보유자에게 이자를 주지만, 중앙은행은 화폐 보유자에게 이자를 주지 않았다. 국채를 발행하면, 정부부채는 증가하는 것이 기존의 상식이다. CBDC는 이자를 지급할 수 있지만, 그냥 돈일 뿐이다. 한국은행 부채계정으로 잡고 발행하지만, 국가부채에는 안 잡힌다. 각국의 중앙은행들 CBDC를 검토하는 이유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CBDC는 금융정책의 룸을 훨씬 넓힐 수 있다.

중앙은행은 CBDC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경기부양에 나설 수 있다. 만약 CBDC가 중앙은행과 민간예금자 간의 직접계좌로 연결될 경우,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 계정은 줄고, 민간은행의 예금계정은 늘어날 것이다. 이는 미국 연준에서 QE 정책을 펼쳤음에도 민간으로의 자금 유입이 미미했던 것과 대비된다. CBDC는 정부 부채를 늘리지 않으면서, 민간에 직접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이다. 프랑스가 CBDC 도입을 서두르는 배경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유로존 국가는 ‘마스트리흐트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연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여야 한다는 보수적 조건이다. 프랑스는 경기부양을 위해 유로화를 맘껏 쓸 수 없다. 하지만 아직 유로존 내에서 CBDC에 관한 법은 없다. 먼저 시작해 CBDC를 정책에 활용해도 막을 수 없다. 이미 프랑스는 2020년 1분기 중으로 은행 간 결제 부문에 CBDC 테스트를 시작할 계획이다.

미국의 현대통화이론(MMT) 논쟁도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균형재정을 추구하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MMT는 기업과 가계가 국가화폐로 세금을 지불하는 한, 정부부채에 대한 채무 불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결함이 많은 논리이나 CBDC 도입은 MMT를 실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CBDC를 민간에 직접 발행하고 CBDC에 직접 이자를 지급하거나 부과해 통화량을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CBDC 도입은 쉽지 않다. CBDC 결제와 원장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지, 그리고 도입되었을 때 금리체계와 민간은행에 가져올 부작용은 어떻게 감소시킬 수 있을지 등등 숱한 난관이 앞에 놓여 있다. 민간과의 거래 제한을 명시한 한국은행법 79조의 개정 여부도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줄 것이다.

지난 시기의 경제 호황은 빚을 끌어당겨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채 의존 경제에서 금리가 급등하거나, 부채를 더 늘릴 수 없을 때 경제는 무너진다. 돈을 더 찍어, 더 고용하고, 더 소비해야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던 케인스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돈이 없으면 소비하지 못하고, 공장은 멈추게 된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 돈의 정의다. 정부의 발권력이 중앙은행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라면, CBDC를 통한 민간관의 직접적 접촉도 가능한 대안이다. 디지털 시대, 가상과 실제의 차이는 별 의미도 없고, 더 나아가 차이가 있을 수도 없다. 금융 위기 이후의 돈은 이미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 공간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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