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1896~1948)은 1896년 4월 경기도 수원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수원 삼일여학교와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4년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발표, 근대적 여권을 주장했다. 1917년에는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부정기 간행물 ‘여자계’ 발간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8년 3월 제2호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소설로, 본격적인 여성 소설 1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졸업 이후 귀국한 그는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이화학당 교사 신마실라, 김활란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 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미 일본 유학 시절 2·8 항일학생선언에 참여하였고, 결혼 후 만주에서는 어려운 독립운동가를 선뜻 도와줄 만큼 민족애도 있었다.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 발행에 적극 참여하면서 남녀 간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랑과 결혼, 정조관 등을 주장하였다.
도쿄 유학 시절 만나 사랑한 최승구가 병사한 뒤 한때 실의에 빠져 방황하였으나 김우영과 1920년에 결혼하였다. 이듬해 3월 경성일보사 임시 전시장에서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여는가 하면, 1회 서화협회전에도 출품하는 등 창작 활동에 열중하였다. 또한 문예지 ‘폐허’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찍이 창작 시 ‘인형의 집’을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처럼 문필과 유화 창작, 두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27년에는 남편과 세계 일주를 할 만큼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파리에서 8개월간 야수파 미술 공부를 한 후 1929년 미국에까지 진출한 그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해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일본의 제전(帝展)에서도 ‘정원’이 입선하면서 최고의 서양화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파리에서 사귄 최린으로 인해 36세에 자신의 의지와 달리 이혼당하면서 그의 삶은 추락 일로였다. 1933년 ‘여자미술학사’를 개설, 운영하며 작품활동과 더불어 후진 양성에도 힘썼으나 그의 창작활동은 1935년 개인전으로 사실상 끝났다.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그가 끝내 행려병자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조차 한국 사회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1995년부터 수원에서는 나혜석 예술제가 열리고, 기념관과 동상을 건립하는 등 그를 기리고 있다. 이제 그는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