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5분 대기조’에요. 선수 부모님들한테 전화 오면 뛰어나갈 준비부터 합니다.” 한 골프선수 매니지먼트사 관계자의 말이다.
시즌을 마친 골프선수들이 새 둥지 찾기에 한창이다. 골프선수 매니지먼트사는 좋은 선수를 놓치지 않으려 5분 대기도 마다치 않는다. 한 해 농사를 위해 씨를 뿌리거나 결실을 보는 시기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을 진정으로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선수와 기업(브랜드) 간 계약 성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 의류 업체(브랜드)와의 협상에선 힘이 빠진다. 선수 성적과 무관한 ‘비주얼’이란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수와 의류업체 사이엔 불편한 이해관계가 오래도록 성립되고 있다. 선수는 의류업체로부터 골프웨어를 후원받아 각종 대회에 참가한다. 선수가 입은 골프웨어는 TV 등 각종 미디어에 노출될수록 브랜드 홍보 효과는 배가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좋은 성적과 후원 계약’이라는 단순 원리가 작용하는 게 아니다.
수년 전 한 의류업체 관계자와 선수 프로모션 담당자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주고받은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저희는 성적보다 비주얼이에요. 성적은 안 좋아도 되니까 비주얼이 좋아야 합니다.” 그들은 선수 후원이란 명목 아래 성 상품화를 부추겼다.
최근 만난 한 여자 프로골퍼는 A의류 브랜드의 화보 촬영을 앞두고 “후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요즘 잘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왜 나를 모델로 쓰냐”는 질문에 “선수들은 이 옷 못 입어요”라는 씁쓸한 답변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골프선수가 입을 수 없는 골프의류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선수 성적에 상관없이 날씬하고 예쁜 모델이 입어야 옷이 산다는 게 의류업체의 주장이다. 선수들은 스스로 성 상품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수와 의류업체의 불편한 이해관계는 오래도록 깨지지 않았다.
의류업체에서 원하는 모델은 ‘44’ 혹은 ‘55’ 치수의 날씬하고 예쁜 여성이다. 의류 브랜드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흔히 말하는 ‘44 사이즈’란 허리둘레 22~23인치가량의 비현실적인 몸매다. 비거리를 늘리고 안정적인 스윙을 구사하기 위해 매일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소화해내는 골프선수와는 거리가 있다. 합리성보다는 타인 시선을 더 의식하는 사고, 그리고 일부 골프의류 업체 MD(merchandiser)들의 골프에 대한 이해 부족이 만든 결과다.
진정으로 골프에 최적화된 의류라면 날씬하고 예쁜 모델에 의존하기보다 골프선수의 현실적인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좋은 옷걸이’에 걸어야만 느낌이 살아나는 골프웨어엔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런 의도라면 차라리 “44 사이즈 여자 프로골퍼를 모십니다!”라는 구인광고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더는 후원이라는 미끼로 선수들의 한 장 남은 자존심마저 들춰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