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때 광문관(廣文館) 박사였던 정건(鄭虔·705~764)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뛰어났지만 늘 가난에 쪼들렸다. 어려서는 종이가 없어 감나무가 많은 자은사(慈恩寺)라는 절의 승방(僧房)을 빌려 거처하면서 감나무 잎에 글씨를 썼다. 신당서(新唐書) ‘정건 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도 ‘이 처사의 심계초당에서 이틀을 묵으며’[信宿李處士心溪草堂]라는 글에서 “가을 든 밭의 감잎에 초나라 역사를 베끼고, 토담집에 관솔불 밝히고 주자의 글을 외노라”[枾葉秋田抄野史 松明土屋誦朱文]라고 쓴 바 있다. 신숙(信宿)은 이틀을 묵는 것, 즉 이박(二泊)이다. 하루 묵는 건 宿이요 이틀 묵는 건 信인데, 나흘 숙박은 신신(信信), 그 이상이면 신차(信次)라고 한다. 재미있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홍한주(洪翰周·1798∼1868)의 시 ‘호젓한 집에서의 감회’[幽居感懷]에도 “단풍잎은 비로 씻겨 취한 듯 붉고/감잎은 가을에 살쪄 글 쓸 만큼 크구나”[楓林雨洗明如醉 枾葉秋肥大可書]라는 말이 나온다. 감잎을 ‘종이에 비할 만하다’[可比之紙]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중엔 물자가 흔해져서 그럴까.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좀 배부른 소리를 했다. “오동 그늘은 목욕하는 것보다 시원하고/감잎은 글씨 쓰기엔 미끄럽네”[桐陰凉過沐 枾葉滑妨書]. 시 제목이 되게 길다. 제목은 ‘승주의 은성재에 손님으로 갔다가 복통으로 12일간 뒹굴던 차에 훈장 허군 동숙과 창수하다’[六月初客昇州之隱城齋以腹疾浹辰宛轉同塾師許君東淑唱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