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통화정책국은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 한은 내에서도 우수한 인재가 몰리는 곳이다.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자 국내 유일의 통화정책 기관인 한은의 핵심 업무가 돈이 가치를 적절히 유지해 원활히 통용될 수 있도록 하는 통화정책이기 때문이다. 한은 인사경영팀 관계자는 “통화정책국은 중앙은행의 핵심 국으로 대체로 직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서다”라며 “이 때문에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 있고 자부심이 남다른 것은 물론 내부경쟁도 무척이나 치열하고 고생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통화정책 결정은 7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금융통화위원회가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은의 정책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가 매달 두 번째 목요일쯤 본회의를 열어 기준금리 등 통화정책 사항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들 금통위원이 통화정책을 잘 결정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 통화정책국이다. 복잡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내외 경제 금융 상황, 타국의 통화정책 동향 등을 종합해 금통위원에게 보고한다. 통화신용정책의 입안, 정책수단 기획 및 운용, 통화신용정책보고서 작성 등의 업무도 통화정책국이 담당한다.
이러한 통화정책국을 이끄는 이가 통화정책국장인데, 한은 총 16국(3개 원 포함)•10실에서 핵심 국장으로 분류된다. 특히 통화정책국장은 임명됨과 동시에 각 부서 장들이 바라보는 5개뿐인 부총재보직을 공공연하게 보장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을 받는 이가 임명된다. 그렇다면 1998년 이후 역대 통화정책국장(=정책기획국장) 중 한은 사람들이 ‘대표 선수’로 꼽는 이들은 누가 있을까. 현 통화정책국의 모태는 1997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기존 통화량목표제에서 물가안정목표제로 바뀌면서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정책기획국으로 불렸으나 2012년 1월부터는 금융시장국의 기능을 합쳐 통화정책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올 초 통화정책국 하위에 있었던 금융시장부는 과거처럼 금융시장국으로 승격됐다.
◇“이주열, 한은맨 최고 엘리트 코스 밟아” = 먼저 이주열 현 한은 총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총재는 2005년 3월부터 2007년 3월까지 2년간 통화정책국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한은맨으로 걸을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재는 통화정책국장에 버금가는 국장 자리로 꼽히는 조사국장도 역임했다. 역대 조사국장과 통화정책국장을 동시에 역임한 이는 최근 10명의 통화정책국장 중 정규영 전 서울외국환중개 사장과 함께 이 총재 단 2명뿐이다. 통화정책국장은 통상 실물과 금융 부분 모두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이 오는 데 이 총재의 경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 그는 해외조사실장(1급)을 맡아 세계경제도 두루 섭렵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장병화 한은 부총재도 2007년 3월~2009년 4월 통화정책국장을 역임했다. 이 총재와 마찬가지로 실물과 금융 모두를 섭렵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총재와 장 부총재는 1977년 입행 동기로 줄곧 선의의 경쟁을 했다는 것이다. 장 부총재는 명문으로 알려진 경북고와 한은에서 주류로 분류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 총재는 강원도에 있는 원주대성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학력 배경에선 약간 차이가 있다. 초기에 이 둘은 업무에서 엎치락뒤치락했지만 2살 많은 이 총재가 승진이 더 빨랐다.
대신 장 부총재는 국내 외국환 거래의 80%가량이 이뤄지는 서울외국환중개의 사장을 2012년 4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역임했다. 이어 부총재까지 맡게 됨에 따라 향후 그의 귀추가 주목된다. 이 총재는 외부기관장을 역임한 경험은 전무하다.
정희전 서울외국환중개 사장도 2009년 4월~2012년 1월 통화정책국장을 역임했다.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통화량에 관여하던 시절 당시 통화운영과장으로서 조금이라도 통화량을 늘려 발행하기 위해 IMF에 끊임없이 맞섰다고 전해진다. 그가 외환위기 극복의 주역 중 한명으로 꼽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이다.
정 사장은 통상 2년가량 통화정책국장을 역임하는 관례와 달리 3년 가까이 맡아 역대 가장 오랫동안 통화정책국을 이끌었다. 정 사장은 2012년 1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국제금융센터 부소장을 담당했으며 이어 바로 서울외국환중개 사장으로 발령받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파고 넘은 ‘주열-병화-희전’ 삼각편대 = 이주열-장병화-정희전 이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한국이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한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은 통화정책국 관계자는 “이성태 전임 총재 시절(2006년 4월~2010년 3월)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당시 부총재보였던 이 총재-통화정책국장이었던 장 부총재-금융시장국장이었던 정희전 사장이 한 ‘세트(set)’처럼 움직이며 기민하게 대처해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위기 상황을 더 잘 극복했는 평가를 들었다고 본다”며 “정부 및 청와대가 이들의 위기관리 능력을 매우 높이 샀고 세분이 모두 현재 잘 된 것은 그 때의 업적이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기준금리를 2008년 10월 연 5.0%에서 2009년 2월 2.0%까지 3.0%포인트나 과감하고 순조롭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실무적인 뒷받침이 상당했다”며 “정부랑 협의할 때 이들 셋이 움직이면 무게감이 남달랐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었다 ”고 회고했다.
눈에 띄는 점이 이들 3명의 성격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나를 따르라’며 강하게 밀어붙이기 보다는 큰 그림을 그린 후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 이들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술에 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허진호 현 한은 통화정책국장, 직전 통화정책국장인 윤면식 부총재보, 김민호 부총재보도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 정상화, 중국 경제의 부진, 신흥시장국의 금융•경제 불안 등으로 한치 앞을 보기 힘든 대내외 경제•금융상황을 잘 헤쳐 나갈 것이라는 내부 신망이 두텁다. 역시나 통화정책국 출신답게 업무에서 주도면밀한 점이 특징이다.
박재환 전 주택금융공사 부사장이자 전 국민은행 사외이사는 2002년 5월부터 2004년 3월까지 통화정책국장을 맡았다. 1997년 한은법 개정 당시 통화신용 정책의 중립성, 자율성 및 자주성 존중조항이 신설되게 하는 데 ‘한은의 대변 논객’으로 역량을 발휘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은 관계자는 “극도로 신중함을 보이는 일반적인 중앙은행 사람들과 달리 선이 굵은 스타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물론 상사에게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소신이 분명한 분이었다”며 “내가 기억하는 통화정책국장 출신 중 가장 활동적(active)인 인물이다”라고 꼽았다.
강형문 8대 한국금융연수원장은 1998년 6월부터 2000년 5월까지 통화정책국장을 맡았다. 통화정책국이 만들어진 후 처음으로 국장을 맡아 지금의 통화정책국 운영체계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큰 주량으로 한은에서 역대 소문난 두주불사(斗酒不辭)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