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마취통증의학 교수, 삼성서울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임상교수. 지난해 8월까지 이병달 씨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화려했다. 엘리트 중 엘리트. 갑(甲) 중에서도 상갑(甲)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훌쩍 여행을 가버리거나, 달리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 좋다. 거기에 젊은이들과 보드카라도 한잔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꼭 해봐야 하는 이 괴짜 의사는 지난해 8월부터 석 달간 다녀온 유라시아 횡단의 꿈에서 아직 깨지 못했다. 철인 3종 경기, 마라톤, 클라리넷 연주에서 유라시아 횡단까지 했으면서 아직까지도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고 싶다”며 멈춰있는 것이 죽어도 싫은 이 사람. 노후에 놀 거리가 무궁무진해서 천 억원 자산가도 부러워하는 이씨를 만났다.
◇14시간 57분
철푸덩. 철인이 되기 위한 여정은 바다에서 시작된다. 겁 없이 바다에 뛰어든 사나이는 호흡은커녕 바닷물 마시기에 여념이 없다. 바다와의 사투가 끝나고 뭍으로 올라와 소금기 가득한 몸으로 사이클에 앉는다. 시간이 지나자 호흡이 안정세로 돌아오나 싶더니 이내 오르막길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는 다시 안장에서 박차고 일어나 페달에 온몸을 싣는다. 그러나 허벅지는 이미 폭발 직전 더블 다이너마이트. 이쯤 되니 ‘철인’이라는 수식어가 이씨에게 조소를 퍼붓는다. ‘넌 안 돼! 그러니 이쯤 되면 돌아가’. 이씨의 귓가에 맴돌며 포기를 종용한다.
한 발 두 발 세 발…. 무거운 발걸음이 더해지자, 천 발, 구백구십구 발, 구백구십팔 발…. 목적지와의 발걸음이 줄어든다. 이씨의 몸놀림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성실하게 뛰다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다. 어둡고 고요한 적막을 그의 거친 숨소리가 깨운다. 그 숨소리의 끝은 철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10미터, 9미터…그리고 피니시 라인. 이곳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널브러진다. ‘철인’이다. 바다에 뛰어든 지 장장 14시간 57분 만에 얻은 쾌거다.
사실 이씨는 자신이 처음 도전한 철인 3종 대회를 완주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몇 달을 철저히 준비했고, 틈만 나면 체력 훈련을 했어도 말이다.
“대회 전 날은 두려움 반, 기대 반이었어요. 엄밀히 말하면 두려움이 더 컸지. 나 자신도 80% 이상은 중도 포기할 줄 알았으니까요. 근데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보니 피니시 라인이더라고요. 17시간 안에 완주를 해야 철인 등록증이 나오는데, 14시간 57분이라는 기록으로 완주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생각보다 쉽게 결과를 얻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이후에도 4번이나 더 완주에 성공했던 그였지만, 첫 완주 후에는 허무함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것은 클라리넷. 그러나 타고난 괴짜 철인 기질이 어디 가겠나. 결국 돌아온 곳은 트랙 위였다.
“뛰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그 순간의 희열은 말로 표현 못하죠. 거기에 남들 하지 않는 것을 먼저 시작하니 성취감도 2배였습니다. 조물주가 움직이라고 사람 만들었지 가만히 있으라고 만들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 모두 저처럼 살아야 될 것 같아요. 땀 흘렸을 때 이렇게 행복한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달리는 의사들과 팀 닥터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가 막 마라톤에 눈을 떴을 때 즈음. 의사들에게도 때아닌 마라톤 열풍이 불었다. 그때 이씨와 함께 춘천마라톤에 출전했던 이들이 뜻을 모아 의사 마라톤 클럽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 때만해도 단순 친목과 운동을 위한 모임이었지 이 후 뜻 깊은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 둘 대회에 참여하면서 ‘달리는 의사들’의 마음속엔 이미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는 것이 스멀스멀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라톤 마니아이기 전에 어쩔 수 없는 의사였다.
그 당시에 일반인 마라톤 붐이 일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주최측은 외형꾸미기에만 바빴지, 참가자들의 안전은 뒷전이었다. 땅에 떨어진 동전이 녹을듯한 여름 아스팔트를 달리는 레이스에서는 참가자들이 쓰러지기도 했고, 레이스 중간에 넘어져 다치는 사람도 비일비재 했지만 결승선을 밟을 때까지는 사실상 주자 자신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그래서 이씨와 달리는 의사들이 생각해 낸 것이 ‘레이스 패트롤’이었다. 2001년 동아마라톤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달리며 응급 상황을 대처하는 봉사를 시행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달리는 팀 닥터를 자처한 것이다. 레이스 패트롤에서 시작한 달리는 의사들의 활동은 ‘소아암 환우돕기 서울시민마라톤’으로 이어졌다. 행사에서 8년 동안 3억 원을 모아 소아암 환우들을 위해 기부를 하기도 했다.
이 씨의 팀 닥터 생활은 이 시기부터 시작 됐다. 레이스 패트롤 이 후 원정단, 청소년 극한 체험, 그리고 최근의 유라시아 횡단을 포함해 총 6번의 크고 작은 팀 닥터를 하며 여러 팀의 건강을 책임져왔다. 이 또한 생기 넘치는 활동을 좋아하는 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팀 닥터만 6번이면 의사 중에도 많이 없을 거예요. 뭐 이젠 팀 닥터에 특화된 의사라고 보면 되죠. 그 동안 노하우도 많이 쌓였고요. 팀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개인의 컨디션을 극대화시키는 일. 이게 팀 닥터의 매력이자 달리는 의사의 매력이죠.”
◇모두가 부러워하는 노후의 먹잇감
“친구 중에 천 억 넘게 재산을 가진 친구가 있어요. 나는 그 친구 보면 참 답답해. 40대부터 쳐온 골프를 아직까지 치고 있다니까? 나이가 먹으니까 타수도 줄지 않아서 스트레스만 늘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재미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그 친구는 저를 매우 부러워해요. 난 즐길 수 있는 먹잇감들이 아주 많거든.”
자신이 괴짜인지 모르고 친구들이 답답하다는 이씨다. 아무리 취미라도 결과가 재미있게 나와야 할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그는 오랜 시간 골프만 쳐 온 친구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보통의 50대, 60대라면 즐기는 스포츠인데도 말이다.
노후 즐길 거리를 ‘먹잇감’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노후 생활에 걱정이 없다. 활기찬 노후를 위한 먹잇감들이 다채롭게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에 재직할 당시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마라톤·자전거·수영 등 3개의 동호회와 철인 3종 경기를 하면서 끌고 온 철인클럽은 웃음으로 가득 찬 노후를 위한 포석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마라톤 대회를 열어 기부를 실천하는 ‘달리는 의사회’를 합쳐도 일주일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렇게 이씨가 동호회에 쏟은 열정은 고스란히 자산으로 되돌아왔다. 삼성서울병원에서 테니스 동호회 창립회장으로 12년, 자전거 동호회 창립멤버와 수영 동호회의 멤버로서 빠짐없이 참여하자 후배 의사들은 그에게 “종신회원이니 퇴직한다고 안 나오면 섭섭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후배 의사들도 이씨의 먹잇감을 챙겨주는 데 톡톡히 한 몫을 한 셈이다.
놀거리, 즐길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에도 이씨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기에 분주하다. 이렇게 기발한 놀거리는 어디서 생각을 해냈는지 기자는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하기 바빴다. 아마도 이 사람. 남들보다 먼저, 남들과는 다른 취미를 가지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에이~. 마라톤, 자전거, 수영을 합친 철인 3종은 50대 초반에 한 것이고, 이제는 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처음 할 때는 50대는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50대 이상이 반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어요. 몸도 예전만큼 말을 듣지 않는 게 느껴지고 말이죠. 그래서 가족과 즐기는 것을 찾고 있어요. 앞으로의 먹잇감은 아마 트라이 사이클(Tricycle:삼륜 오토바이)가 아닐까 싶어요. 아내와도 즐길 수 있고 말이죠. 매의 눈으로 1~2년 정도 더 지켜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