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가 투명한 캔디통에 담아둔 노랑, 파랑, 초록, 분홍의 종이학들, 작은 손아귀에서 힘겹게 잉태했을 열댓 마리 목숨들을 보면서 아직은 많이도 허전하고 외롭구나를 생각하는 못난 아빠. 네가 국민학생이 된 이래 첨으로 네 자리에 앉아 네가 키우는 꿈들을 가만가만 만져본다.
아빠가 준 해 바뀐 다이어리를 곱게 꽂아두고, 가위며 칼들에까지 조미라를 큼직큼직하게 이름 새겨놓은 너의 소유권. 이름 위에 초록으로 덧칠하고 또 덧칠해서 이름을 밝히는 여덟 살짜리 촛불 같은 영혼.생일날 친구에게 받은 동시 테이프를 애비가 잠들 때 틀어 주며 이마를 만져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불꽃 같은 영혼.
95년 겨울은 이렇게 시작되는데 애비의 창(窓)에는 좀체 햇살이 들질 않어. 마음의 창에 때가 끼고, 빗물이 흘러내려서일까. 니코틴과 알콜 찌꺼기들만 지방과 단백질 더미에 매캐하게 걸려서 일까.
가만가만 숨 죽이며 현관을 나서 길로 내려서니.맞아주는 초겨울 시원한 바람.불현듯 이십오륙 년 전 암곡(暗谷) 초롱불 밑에서 맞았던 무서리와 알밤 터지는 밤이 생각나는구나.옮겨온 것일까. 유년의 꿈들이 서울땅에서, 나의 아이 세포에서 되살아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