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지난 3일자로 부회장 2명, 사장 9명, 전보 7명 등 18명의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대신 삼성카드 최도석 부회장과 김재욱 삼성LED 사장, 배호원 삼성정밀화학 사장, 유석렬 삼성토탈 사장, 성영목 호텔신라 사장 등이 자리를 떠났다.
승진자가 있으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게 세상사다.
이어지는 임원인사 결과에 따라 수백명에 달하는 삼성맨들이 20여년 이상 몸을 담았던 조직과 이별해야 한다. 이들은 모두 사업환경이 척박했던 시절부터 오늘날 글로벌 삼성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한국경제와 삼성의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더 큰 영광을 누릴 기회는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은 삼성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 ‘암’치료도 마다한 ‘삼성맨’= 최근 삼성전자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경영일선에서 완전하게 물러난 이학수 삼성물산 고문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이 고문이 그룹 비서실장이던 시절 어두운 표정의 이 고문을 비서실 직원들이 염려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당시 비서실에 재직 중이던 K씨는 “기분이 안좋거나 업무적 스트레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고문이 그날 암 판정을 받았던 날”이라고 전했다.
상식적으로 암 판정을 받게 되면 회사 생활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입원과 함께 일손을 놓기 마련이지만 이 고문은 “내가 아니면 누가 비서실 일을 마무리짓겠나”라며 수술을 6개월이나 미루면서까지 현안 업무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같은 열정이 그를 비서실장→구조조정본부장→전략기획실장 등 10여년간 ‘삼성의 1인 지하, 만인 지상의 2인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회자되고 있다.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최근 문책성 인사로 일선에서 물러난 이학수, 김인주 고문 등이 업무추진 과정 상에서 잘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삼성이 있게 한 공로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 ‘젊은 삼성’후폭풍도 사상 최대 전망= 지난해 삼성은 380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임원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평생 직장인 줄 알았던 ‘삼성’이라는 둥지를 떠난 임원들도 승진 숫자에 비례한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통상 조직이 크게 확대되지 않는 한 임원 승진 자 수 만큼 퇴직하는 임원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조직의 생리를 설명했다.
특히 올해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젊은 조직론’발언 여파로 지난해보다 더 큰 규모의 임원인사가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삼성을 떠나는 삼성 임원들이 올해는 유례없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젊은 삼성을 위해 임원 승진을 못한 고참 부장급들도 상당수 명예퇴직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노장(?) 임원은 “그동안 상위 직급 승진에서 수 차례 고배를 마신 임원들은 이번 임원 인사에서 어느 정도 각오들을 하고 있다”며 “(인사의)뚜껑이 열려봐야 알겠지만 올해 임원인사 분위기는 예년과 다른 것 만은 분명하다”고 전했다.
신입사원에서 기업의 별이라고 불리는 임원자리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적어도 2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는 “젊은 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조직과 이별을 준비하는 동료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난다는 후련함도 있지만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진 조직과 이별을 한다는 섭섭함이 교차하고 있다”고 전했다.
◇ 성우회 활동 통해 ‘삼성맨’ 유대 이어가= 이렇게 물러난 삼성그룹의 퇴직 임원들은 ‘성우회’라는 퇴직임원 모임에 가입, 삼성과의 유대관계를 이어간다.
지난 1992년 조직된 성우회는 삼성 퇴직 임원들이 등산, 골프 등 다양한 친목도모 행사와 자원봉사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성우회’ 홈페이지 주소(www.samsungforever.com)를 보더라도 이들이 ‘삼성맨’이었다는 자부심이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성우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직 삼성전자 한 임원은 “다른 그룹도 퇴직임원 간 모임이 있지만 ‘성우회’처럼 조직적이고 활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성우회는 삼성그룹의 각 계열사들이 배포하는 보도자료도 홈페이지에 게재해 자신들이 몸 담았던 회사의 소식을 지속적으로 알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계절별로 회보를 발행해 회원들 간의 동정에 대해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삼성 퇴직임원들은 성우회 말고도 각 계열사나 공채기수별로도 모임을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삼성과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지난 1999년 만들어진 전자계열사 퇴직 임원들의 모임인 ‘전자사랑’은 성우회보다 훨씬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그룹 단위의 퇴직 모임 뿐만 아니라 각 계열사별 퇴직 임원 모임을 가지면서 ‘삼성맨’으로서 일정 기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본사 차원에서도 이들 퇴직자 모임에 대해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20년 넘게 몸담았던 조직이라도 퇴직 하게 되면 회사는 물론 동료들과의 유대관계가 끊어지기 마련”이라며 “하지만 성우회와 같은 친목모임이 있어 ‘삼성맨’으로서의 자부심을 추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삼성이 그룹과 계열사 차원에서 퇴직 임원들에 대한 예우를 하는 이유는 그동안 수고를 했다는 표시다.
특히 삼성은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리 폭로 이후 퇴직 임원들에 대한 관리 및 예우가 한층 강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임원들은 사내 기밀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고위직의 경우 고급 기밀을 자주 다루기 때문에 퇴직 후에도 특별하게 대우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