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의 나라 기업에 이래라, 저래라?…미국이 삼성·SK 통제하는 이유는 [이슈크래커]

입력 2023-03-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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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의 발표에 전 세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난해 발표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ct·반도체법)의 세부 규정안이 공개됐기 때문인데요.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한국 반도체 산업의 필두에 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발표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데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법에, 중국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까지 휩쓸릴 위기에 처한 겁니다. 다행히, 오늘 발표된 반도체법의 세부 내용을 살펴본 전문가들은 두 기업의 활로가 막히지는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의아합니다. 한국 기업들의 미래가 왜 미국 발표에 달린 걸까요? 미국이 삼성전자와 SK를 통제하는 이유, 반도체법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미국은 왜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건드리나

미국은 오래전부터 반도체 산업에서 최강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반도체는 첨단 무기부터 인공지능(AI)까지 폭넓게 활용되는 ‘미래 산업의 쌀’이기 때문입니다. 투자가 6개월 늦어지면 시장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반도체 산업에서는 다른 나라들과의 공조는 불가피합니다. 제조 공정이 세분화된 있는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특징 때문이죠.

반도체 제조 공정은 크게 △팹리스(설계) △파운드리(생산) △패키징(후공정)으로 나뉩니다. 개별 제품의 특성을 설계에 반영해야 하는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할 때는 한 기업이 이들 과정을 모두 전담하기 어렵죠. 이에 기업마다 특화된 분야가 다릅니다. 한국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미국 인텔은 팹리스에 강점을 가지는 식입니다. 세계적 반도체 생산 기술을 보유한 국가는 한국, 대만, 일본으로 평가받는데요. 따라서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들 국가와의 협력이 필수적인 셈입니다. 미국이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네 국가가 참여하는 ‘칩4’ 동맹을 추진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미국이 꾸리는 반도체 동맹의 반대편에는 중국이 있습니다. 반도체 경쟁에서 이기려는 기저에는 미·중 패권 다툼이 있죠. 21세기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중국과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 사이에는 유구한 갈등이 있습니다. 2018년 무역 갈등을 계기로 두 국가의 경쟁은 경제·산업 분야 전반으로까지 확대됐는데요. 중국은 2014년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450억 달러(약 57조 원) 규모 국가집적회로 산업 투자펀드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반도체 굴기에 나섰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중국제조 2025 전략’을 도입해 1조 위안(약 186조 원) 이상의 반도체 지원 패키지를 만들기도 했죠. 지난해부터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전략에 맞서 1430억 달러(약 185조 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을 준비하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반도체법을 필두로 한 미국의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 지원에는 중국 견제가 있는 셈입니다.

▲(AP/뉴시스)
▲(AP/뉴시스)
‘보조금 줄 테니 중국 투자 말라’는 반도체법…삼성·SK 직격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542억 달러(약 70조 원) 규모의 반도체법은 패권 유지와 반도체 산업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미국 정부의 묘안입니다. 반도체법은 미국 내 반도체 시설을 건립하면 총 390억 달러(약 51조 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글로벌 기업에게는 25% 세액공제를 지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죠. 삼성전자,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를 유도해 미국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누리는 것이 목적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미국은 중국 저지를 겨냥해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덧붙였는데요.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은 반도체 기업들은 향후 10년간 중국 등 미국이 지정한 ‘우려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 확장을 위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문제는 저렴한 인건비 등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 반도체 생산 공장을 운영해왔다는 건데요. 가드레일 조항이 엄격하게 적용될 경우 당장 반도체 생산에 차질을 빚게 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40%가량을,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량의 약 50%를 중국에서 생산 중이죠. 다급해진 한국 측은 미국에 기업 사정을 설명하며 독소 조항들에 대한 재고를 요청했는데요.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기업들에도 동일한 보조금 조건을 적용하고 있다’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반도체 기업에 해당하는 문제여서, 전 세계가 미국이 설정한 가드레일 조항 관련 세부 규정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조항이 ‘반도체 생산능력 확장’과 ‘거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기업 존망이 결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날 공개된 세부 규정안 내용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 시설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첨단 반도체의 경우 생산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는 투자 제한이 걸려 있어 업계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뉴시스)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뉴시스)
고래 사이에 낀 한국…‘사드’ 악몽이 발목

미국과 중국 사이 낀 한국은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제까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전략을 고수해왔는데, 이제는 방침을 바꿔야 할 때라는 얘기가 나오죠. 미국이 반도체 산업은 물론 안보협의체, 경제협력체 등을 동원해 적극적인 대중국 진영 구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줄타기 외교는 효력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미국 우호 노선을 강화하기에는 중국이 걸립니다. 그동안 중국은 한국이 칩4,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에 참여 의사를 밝힐 때마다 반발 의사를 표했습니다. 지난해 11월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가진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경제 협력을 정치화하고 범 안보화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며 미국의 중국 배제 행보에 동참하지 말라는 뜻을 드러냈죠.

미국이 칩4 동맹을 제안하자 곧 가입 의사를 표명한 일본, 대만과 달리 한국이 칩4 참여를 분명히 하지 못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2016년 7월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이 실시한 문화·경제 보복 조치의 뼈아픈 기억이 남아있는 만큼, 한국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죠. 한국 무역에서 대중 수출 의존도는 약 25%로,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한국 앞에는 중국을 이해시키면서도 미국의 반도체법과 지원책을 따져봐야 하는 복잡한 숙제가 남겨졌습니다. 직접적 투자와 협력을 압박하는 미국 반도체법은 한국 기업들에 계륵인데요. 이런 와중에 미국은 대중국 압박을 강화할 것을 보입니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관련 추가 조치를 다음 달 발표할 예정이죠. 미국은 이미 생산장비 강국 네덜란드, 일본과 조율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의 기민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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