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도의 전체 맥락을 보면 작년 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2018년 이후 북-미 관계에 대한 ‘총화(반성과 비판)’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김 위원장은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미국과 담판을 지으려 하였던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선뜻 만나 주었고 회담 성과도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노이 2차 회담은 완전한 비핵화를 뒤로 미룬 채 북-미 관계 개선과 제재 해제라는 목표를 이루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던 것 같다. 그 정도의 목표가 아니고서는 최고 존엄이 여러 날 동안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하노이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노이 노딜은 매우 아픈 일격이었다. 최고 존엄이 패장이 되어 다시 그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최고 존엄의 치욕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작년 봄부터 ‘새로운 길’, ‘연말까지’를 이야기하면서 미국을 압박했으나 미국은 응하지 않았다. 이번 중앙위원회는 북한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다 불러 모았다. 그들 앞에서 미국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정면 돌파’를 수십 번 외쳤다. 강력한 언어로 전의와 결의를 다졌다. 당과 내각의 간부들도 대폭 갈아치웠다. 하노이를 뒤로하고 최고 존엄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총화’였던 셈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외침은 쇠사슬에 묶인 맹수의 노호처럼 들렸다. 미국에 대해 격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대부분 조건절들이다.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중지 문제는 ‘대방도 없는 공약에 우리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매여 있을 근거가 없어졌다’고 하면서 여운을 남겼다. ‘충격적인 실제 행동’도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도 모두 미래형이다. 모호하기는 경제 부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면 돌파를 강조하고 있지만 방향이 분명치 않다. ‘경제 사업에 대한 통일적 지도와 전략적 관리’를 이야기하고 ‘오늘날까지 와서 지난 시기의 과도적이며 임시적인 사업 방식을 계속 답습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얼핏 시장화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동시에 ‘현존 경제적 토대를 효과적으로’, ‘현실에 발을 튼튼히 두고’라고 하면서 현실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북한 주민들은 소득의 70% 이상을 시장에서 얻고 북한 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현실’은 어느 현실인가.
미국 문제에 나타나는 모호성은 김 위원장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막 나가기에는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 요소다. 북한이 제재 속에서 살아가려면 중국과 러시아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하다. 당장 핵이나 장거리 미사일 도발을 하면 미국은 제재를 강화하자고 할 것이다. 이것은 필경 중-러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국내 부분도 모호하다. 허전하게도 들린다. 그가 지난해 경제적 성과로 내세운 것들이 삼지연시 꾸리기 2단계 공사, 산간 문화도시 건설, 중평 남새(채소)온실농장과 양묘장 같은 것이다. 2400만 주민이 움직이는 경제의 성과로 이들을 내세운 것이다. 제재가 옥죄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경제의 절반 이상이 계획이 아닌 시장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당과 내각의 실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많기는 어렵다. ‘내각책임제’를 부르짖고 있지만 선대에 이미 나온 이야기들이다.
무엇이 새로운 길인지, 무엇을 정면 돌파하자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분하고, 답답하고, 아래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그냥 큰소리쳐 본 것처럼 들린다. 이 와중에서도 확 눈에 띄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경제 건설에 유리한 환경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화려한 변신을 바라며 지금껏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 수는 없다’고 했다. 지구 중력과도 같은 비핵화와 개방, 개혁이라는 길을 애써 거부하고 있다. 뒤집어 보면 핵을 포기하고 화려하게 변신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면 돌파’를 그토록 여러 번 외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이런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내년에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