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속으로] 짜장면의 지혜

입력 2019-06-12 17:53 수정 2019-06-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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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배달(倍達)의 민족은 짜장면을 좋아한다. 외식이든 배달(配達)이든 최우선 순위의 음식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사랑하는 짜장면을 한국식으로 만들어 미국에서 팔았다. ‘현지에서 먹힐까?’라는 프로그램은 스타 셰프 이연복을 앞세워 한국식 짜장면을 파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짜장면이 원래 한국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먹는 짜장면은 중국 음식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식 중국 요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필자에게 짜장면은 특별하다. 졸업식을 연상하게 하고, 가족들의 외식을 기억하게 한다. 서울 을지로의 안동장은 졸업식의 성지 순례길이었다. 가족의 누군가가 입학을 하거나 졸업을 할 때도, 타지의 친척들을 만날 때도 중국집의 짜장면은 늘 그 기억을 함께 했다. 짜장면은 우리에게 일상이기도 하다.

일상의 짜장면은 우리 문화에 깊이 들어와 있다. GOD의 ‘어머님께’ 노래 가사에는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가 나오고,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나상실은 “지나간 짜장면은 되돌아오지 않아”를 외쳤다.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짜장면을 먹는 장면은 익숙한 우리의 일상이 잘 녹아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짜장면은 슬픈 역사에서 출발한다. 중화요리의 다른 이름은 청요리였고, 그 시작은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청이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산둥 주둔군을 제물포에 배치하고, 제물포는 청의 조계지가 됐다. 이때부터 부두 노역자들이 먹기 시작한 음식이 짜장면이다. 한국에 진출한 화교가 대부분 산둥성 출신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리사 이연복도 산둥 출신 화교의 후예가 아닐까 싶다.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에 머물고자 하는 조선의 수구파가 있었기에 그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갑오농민혁명이 반발하자 다급해진 조선 국왕은 청에게 출병을 요청했고, 청군이 들어오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에 따라 군대를 보낸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스스로 해산했지만, 일본은 물러나지 않고 인천 앞바다에서 청을 공격한다. 이후 일본이 압록강을 넘어 진격하고 뤼순이 함락되고, 결과는 일본의 압승으로 끝난다. 동아시아의 질서가 바뀌는 순간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은 중국인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다.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 질서 밖에 있던 일본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의 독립과 대만의 할양, 그리고 3억 엔의 배상금이 주된 내용이었다. 당시 일본 1년 재정규모가 7000만 엔이었음을 감안하면, 청일전쟁에서 쟁취한 배상금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군비를 확장해 대일본제국으로 나아갔다. 특히 대만을 쟁취함으로써 일본은 드디어 식민지를 획득한다. 중국인 대다수에게 대만 할양은 수치스러운 지난 100년을 떠오르게 한다. 두 개의 중국 이슈가 민감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모노세키조약 1조가 ‘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였다. 조선의 새 국왕이 즉위하면 청의 사신이 오고, 임금은 영은문 옆의 모화관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다. 독립문이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세워진 이유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변화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차이는 뭐였을까? 일본은 변화를 내재화했지만, 청과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 후 일본은 거액의 배상금을 기반으로 화폐제도를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재편한다. 당시 청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의 화폐제도는 은본위제였고, 서구의 화폐제도는 금본위제였다. 일본은 서구경제로의 편입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고, 그 힘으로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을 침략했던 것이다.

일본의 서구 지향은 19세기가 아닌 16세기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서구와 소통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1653년 하멜이 표류했을 때 조선은 그를 활용하지 못했지만, 1636년 이후 일본은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 문물을 들여오고 내재화한다. 1874년 스기타 겐파쿠가 ‘해체신서’를 번역 출간하면서부터 일본은 탈아시아를 시작한다. 번역으로 난학이 발전하고, 이로 인해 축적된 지식이 내재화되면서, 근대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은 오구라 기조가 지적했듯이, ‘도덕지향성 국가’인 한국에서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되어 왔다. 하지만 그의 지적대로 ‘도덕지향적’과 ‘도덕적’은 다르다.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고 이념으로 갈등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우리나라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와 진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임오군란, 갑신정변 속에서 수구와 개혁파가 다투며 눈치만 보던 때가 연상된다. 서로 도덕적 헤게모니 싸움만 할 뿐이다.

조선 후기와는 달라야 한다. 19세기 말처럼 한반도가 두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는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본은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를 내재화했다. 짜장면을 처음 대했던 우리 조상들이 먹어 보지도 않고 거부하거나, 한국의 입맛에 맞게 변형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미국인이 한국 음식이라 생각하는 ‘한국의 짜장면’은 없었을 것이다. 짜장면은 우리가 받아들인 문화를 내재화해 다시 세계에 내놓은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앞서간 서구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빠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쉽게도 여전히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도덕지향적 성향으로 그들만의 이념만을 옹호하고 있다. 그 옛날 부두 노동자들은 짜장면을 먹으면서 이념을 논하지 않았다. 진영 논쟁도, 민족주의도 너무 구시대적이다. 미래를 생각하자. 이번에도 일본이 앞서가고 있다. 정치 지형의 변화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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