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한진그룹에 대해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경영 자율성 침해’,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연금사회주의’로 향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동시에 한진그룹 경영 참여를 둘러싼 주주(조양호 일가·KCGI·국민연금 등)들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16일 오전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회의를 열고, 위원회 산하 수탁자책임위가 대한항공·한진칼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행사 여부 및 행사 범위를 검토해 보고하도록 결정했다. 기금위는 수탁자책임위의 논의 결과를 토대로 주주권행사 이행 여부와 방식을 2월 초까지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재계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이번 주주권 행사는) 앞으로 개별 기업이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앞서 한국경영자총협회 또한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에 적극 나설 경우 기업에겐 상당한 부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재계는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이 개별 상장사에 대해 주주권행사 방향을 논의한 것이 처음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서 국민연금의 이번 주주권 행사가 ‘연금사회주의’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의 국내 기업은 3%룰(상장사의 감사·감사위원을 선임할 경우 지배주주가 의결권이 있는 주식의 최대 3%만 행사할 수 있도록 제한한 규정)에 묶여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받고 있다. 2017년 말 기준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율을 보유한 국내 기업 수가 280여 개에 달한다는 점도 이러한 분석에 힘을 싣는다.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지배구조포럼과 공동으로 이날 전경련 회관 컨퍼런스 센터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도 같은 주장이 제기됐다.
주제 발표자로 나선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는 공적연금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계가 있는데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독립성과 책임성을 어떻게 강화할지에 대한 방안이 반영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특히 “국민연금의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이 복지부 장관이고 당연직 위원 4명이 주요 부처 차관인 상황에서 독립성 확보 방안 없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활용한다면 국민연금의 정치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도 “국민연금법 제102조 2항에서 국민연금이 최대수익을 획득하도록 운영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사회적 가치를 위해 손실을 야기할 수 있는 개입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2025년에는 국민연금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9%를 가질 것이라는 전망인데,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연금이 기업경영에 개입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고 주장했다.
한편,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결정에 따라 한진그룹 주주들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졌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사모펀드인 KCGI의 경우 우선 국민연금의 움직임을 관망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양호 회장과의 표대결에 앞서 국민연금과의 동맹이 유력히 점쳐지는 가운데, 경영 참여의 실익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호 지분 확보에 집중하고 있는 한진그룹의 상황은 악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진칼과 한진의 소액주주들이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KCGI 혹은 국민연금의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한진그룹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내긴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