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와 태양광, 철강에 이어 지식재산권이 트럼프발 통상 압박의 다음 표적이 될 것으로 점쳐지면서 국내 제약업계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업계는 미국 제약사들이 수출을 늘리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며 우려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면서 선을 긋고 있지만 미국발 통상전쟁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는 만큼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12일 미국무역대표부(USTR)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교역국의 지재권 보호 수준을 평가하는 USTR의 ‘스페셜 301조’ 보고서가 4월 발표된다. USTR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자국의 단체 및 업체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를 8일(현지시간) 개최했는데 이곳에서 미국의 최대 제약단체인 제약협회(PhRMA)가 한국, 캐나다, 말레이시아의 우선협상대상국 지정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되면 관세 부과, 수입제한 조치 등의 제재가 진행된다. 앞서 미 제약협회는 2월 중순 미국 제약사의 신약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한국의 약가정책이 자국의 지재권을 침해한다며 ‘스페셜 301조’로 무역 보복을 가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한국은 보고서가 처음 나온 1989년부터 매년 모니터링 대상이 되는 우선감시대상국 또는 감시대상국 명단에 올랐지만 지정된 적은 없다. 산업부는 올해에도 한국이 지정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전망하지만 최근 미국의 통상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점을 감안하면 속단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세탁기는 미국 업체 월풀, 철강은 미국 철강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처럼 제약협회의 요구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한국은 사보험 시장 위주의 미국과 달리 공보험이 기반인 만큼 한국과 미국의 약값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반박하고 있는 입장이다. 한국의 건강보험 체계는 다국적 제약회사를 차별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 국내 보건산업에 기여한 회사에 약값 혜택을 주는 것이며 신약 가격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공단에서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국내 제약업계도 “다국적 제약사들이 트럼프발 무역제재 분위기를 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라며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수년 전부터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KRPIA)는 ‘우리나라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약가 수준 비교 연구(2014, 성균관대 약대 이의경 교수)’ 결과를 들어 신약의 약가가 OECD 회원국 평균가격의 45% 수준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왔지만 단순 비교는 부적절하며 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 의약품, 개량 신약 등을 충분히 생산해 필요한 공급량을 맞춰준 영향도 크다는 것이 국내 제약업계와 전문가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도 “미국 제약사들이 우리 정부에 통상 압력을 통해 미국 의약품의 약가를 올리려는 의도“라며 “무리한 요구인 만큼 통상당국이 적절히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