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미국ㆍ유럽과 같이 임상시험 정보 공개 범위가 대폭 확대된다. 환자들의 임상 참여 기회가 확대되고 부정적 임상 정보를 고의로 숨기는 ‘깜깜이 임상’ 관행이 개선되는 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다만 실시간 정보 공개로 연구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일부 우려의 시각도 있다.
◇이르면 내년 말께 미국ㆍ유럽처럼 임상시험 정보 공개범위 대폭 확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15일 ‘임상시험 정보 등록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을 담은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개정안에는 임상시험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임상시험 진행단계를 제출하고, 식약처는 해당 정보를 공개토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임상시험계획승인을 받은 자는 식약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임상시험계획서에 포함된 임상시험계획서, 최초 및 최종 시험대상자 등록 현황, 최종 시험대상자 관찰 종료 현황, 임상시험 실시상황, 임상시험 결과 등을 제출·등록해야 한다. 식약처는 제약기업 등이 제출한 임상시험 실시상황 정보를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한다.
‘임상시험 정보 등록제도’는 개정안 공포 이후 1년 뒤에 시행된다. 이르면 내년 말께 식약처가 새롭게 구축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 범위가 확대될 전망이다.
임상시험 정보의 공개 범위를 대폭 확대해 환자들의 임상시험 접근성을 높이고, 임상시험의 부정적인 결과 비공개 방지 등을 통해 임상시험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식약처 관계자는 “국제 임상시험 등록사이트 ‘ClinicalTrials'를 국내에서도 도입한다고 이해하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국내에서는 미국과 유럽과는 달리 임상시험 정보가 제한적으로 공개돼 ‘깜깜이 임상’이라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국내 임상시험 정보 공개 현황을 보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임상시험 계획 정보의 일부를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임상시험 제목, 신청자, 승인일자, 진행현황, 시험약 제품명, 대조약 유무, 위약 유무, 대상질환명, 다국가/국내, 시험단계, 성별, 대상자 수, 기간, 실시기관명, 기관 주소 등이 공개항목이다. 그러나 임상시험 실시상황이나 결과의 등록은 의무화하지 않는다. 임상시험계획의 일부를 공개하는 과정에서도 성분명이나 임상방법 등은 제3자가 알아볼 수 없도록 모호하게 게재하는 경우도 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운영하는 임상연구정보서비스(CRIS, Clinical Research Infiormation)에서도 임상시험 세부 정보를 공개하지만 전체 진행되는 임상시험의 20% 가량만이 등록된 상태다.
미국(www.clinicaltrials.gov)이나 유럽(www.clinicaltrialsregister.eu)에서 정부 차원에서 임상시험 정보 등록을 의무화하는 것과 비교하면 국내에서의 임상시험 공개 범위는 극히 제한적인 셈이다.
지난 7월 국회에서 열린 '임상연구 수행의 투명성 확보 및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한 토론회'에서 백선우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 사무처장은 “국내에서도 2010년부터 CRIS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임상시험정보 등록을 권장하고 있는데, 아직 용량이 작고 활용가능한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풍부한 데이터베이스가 제공되기 위해서는 등록범위 등을 제도적으로 제정해서 의무화해야 한다”고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한미약품의 항암제 ‘올리타’(HM61713)의 경우 지난 4월 임상3상시험계획을 승인받았다. 당시 ‘이전에 1 종의 상피성장인자수용체-티로신 키나아제 억제제 (EGFR-TKI) 치료를 받고 질병이 진행한 T790M 돌연변이 양성 국소 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 폐암 (NSCLC) 환자에서 백금 기반 2 제 표준 항암화학요법과 비교하여 HM61713 의 유효성을 평가하는 다국가, 무작위 배정, 다기관, 활성 대조, 라벨 공개 제 3 상 임상시험’이라는 임상시험 계획의 요약 내용과 임상시험실시기관 등의 정보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후 이 임상시험이 어떤 단계를 진행하고 있는지는 제 3자가 파악하기는 힘들다.
미국에서는 ‘Not yet recruiting'(임상참여자를 아직 모집하지 않음), 'Recruiting'(임상참여자 모집 중), 'Suspended'(환자모집보류), 'Terminated'(임상시험 조기 중단) 등 임상진행상황을 세부적으로 공개하는 것과 비교하면 국내에서의 공개 범위는 미미한 수준이다.
◇'깜깜이 임상' 환자 접근성 취약..기업들, 유리한 정보만 공개로 투명성 저해
불투명한 임상시험 정보 공개는 사회적으로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진행 중인 임상시험 정보가 없다보니 환자들이 임상시험을 통한 치료기회를 확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았다. 식약처 측은 “희귀질환·말기암 환자 등에게 신약개발과 임상시험은 마지막 치료기회로 인식되고 있지만 임상시험계획 승인 정보의 일부만 공개돼 환우회 등 비공식 통로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는 실정이다”라고 지적했다.
연구자들도 임상시험과 관련된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다. 임상시험 정보를 데이터화 하면 환자, 연구자, 기업, 정부 등의 정책 개발, 임상시험 중복방지, 신약개발 등에 활용할 수 있지만 제한된 정보 접근성이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특히 그동안 제약사나 바이오텍들이 임상시험의 부정적인 결과를 숨기면서 임상시험 투명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계속됐다. 현행 제도에서는 임상시험의 종료 여부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제 3자 입장에선 임상시험 계획의 승인 이외의 정보를 직접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기업들이 회사에 유리한 정보만 공개한다는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기업들은 임상시험 계획을 승인받은 이후 투약 개시, 임상시험 종료 등 긍정적인 뉴스를 자발적으로 공개하기도 하지만 임상중단이나 임상실패와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자율적으로 노출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얀센이 한미약품으로부터 기술을 넘겨받은 당뇨비만치료제 'JNJ-64565111'의 개발 진행 과정을 ‘recruiting’(환자모집) ‘suspended participant recruitment’(환자 모집 유예)으로 변경하면서 임상시험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이 공개된 바 있다. 당시 한미약품은 핵심 플랫폼기술인 '랩스커버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며 곤혹을 치렀고 한미약품은 적극적인 정보 공개와 대응을 통해 의혹의 눈초리에서 벗어나는 분위기다.
반면 국내에서는 임상시험 관련 부정적인 정보는 외부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임상시험 과정에서 발생한 변수는 이해 당사자 극소수만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임상시험에 실패해 중단됐는지 여부도 해당 기업이 자발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외부인은 파악할 도리가 없다.
업계 일각에서는 “일부 제약·바이오 기업이 투자 유치나 주가 부양을 위해 임상시험 관련 긍정적인 정보만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부정적인 정보는 적극적으로 외부 유출을 차단하는 관행은 공공연한 비밀이다”라고 꼬집었다.
◇제도 정착시 임상시험 투명성 제고..일부 업계 "부정적 정보 공개시 연구 위축 등 가능성"
임상시험 정보 등록제도가 정착되면 실패한 임상시험 정보도 실시간으로 공개될 수 있다.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보면 임상시험계획서는 최초 시험대상자 선정 전에 제출해야 하고 최종 시험대상자 관찰 종료 현황은 임상 종료 후 20일 이내에 등록해야 한다. 임상시험이 시작된 이후 매년 실시상황을 다음해 3월말까지 공개해야 하고 임상시험 결과는 최종 시험대상자 관찰 종료 후 1년 이내에 제출·등록해야 하도록 명시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국회에 제출한 임상시험 중단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의약품 임상시험을 조기 종료했다고 보고한 건수는 총 166건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식약처로부터 승인받은 임상시험 계획은 총 2230건 대비 임상시험 중단 보고 건수의 비율이 7.4%에 불과했다.
제약사나 바이오기업들이 중도에 포기한 임상시험을 모두 정부에 보고했다면 국내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의 성공률이 90%를 웃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통상 신약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 성공률에 10% 안팎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임상시험에 실패하고도 보고하지 않은 사례가 많을 것이란 의심이 설득력을 얻는다. 일부 업체들의 경우 내부적으로는 임상시험 실패를 인지하고 연구를 중단하고도 외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관행이 만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상시험 정보 등록제도가 시행되면 진행 중인 임상시험 실시상황을 매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임상실패 여부를 은폐하는 관행은 상당 부분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식약처는 개정안의 규제영향분석서를 통해 “임상시험계획의 승인을 받은 자가 자발적으로 공개하도록 권고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결과 비공개 방지 및 효율적 관리를 위해 정부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제도 시행에는 큰 걸림돌은 없어 보인다. 식약처는 임상시험 정보 등록제도 시행으로 연간 약 1억3600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 평균 업체당 약 평균 3건의 임상시험 계획을 승인받는 점을 고려하면 기업들의 업무 부담이 크게 늘지는 않을 것으로 식약처는 판단했다.
다만 자발적인 임상시험 정보 공개 분위기가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부정적인 임상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분위기가 확산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미약품의 신약 권리반환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국내에서는 임상시험 실패를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닌 기업의 과실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연구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업 분위기도 문제일 뿐더러 임상시험 관련 부정적인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개되면 투자 유치 실패나 주가 급락과 같은 심각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어 연구 활성화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라고 토로했다. 또 기업활동과 관련된 세부 내용을 제3자에게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이에 대해 식약처 관계자는 “제도 정착을 위해 기업들의 적극적인 정보 공개 참여가 절실하다”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