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미국과 영국 정도 되는 국가에서도 여론조사는 수시로 망신을 당한다. 이름난 조사기관이 많은 데다 조사기술이 크게 발달해 있고, 응답자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잘 밝히는 경향이 있는데도 말이다.
어디 이들 사례뿐이겠나. 미국 대통령 선거만 해도 루스벨트와 랜든이 대결했던 1936년 선거와 트루먼과 듀이가 맞붙었던 1948년 선거부터 시작해 여론조사는 수시로 엉터리 예측을 해 왔다. 2012년 오바마와 롬니의 대결에서도 ‘라스무젠 리포트’ 등 일부 주요 조사기관들의 최종보고서는 롬니의 승리를 예측했다.
우리는 이들 국가와 비교하면 조사환경이 훨씬 더 나쁘다. 이를테면 자기주장적인 문화가 약한 데다 조사자에 대한 신뢰도 낮다. 응답자들부터 소극적이다. 대답을 잘 하지 않거나, 힘이 있거나 대세를 이루는 쪽을 선호하는 것처럼 대답하기도 한다.
조사환경이 이런 만큼 이를 교정하기 위한 기술이나 경험이 더 많이 개발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또한 그렇지가 않다. 다른 나라와 달리 예측성을 높이려고 이런저런 보정을 하는 것도 국가(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실험적 노력이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러다 보니 틀리기가 다반사, 총선은 맞는 경우보다 틀린 경우가 더 많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총선 때만 해도 그렇다. 대부분 여론조사기관들이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의 ‘대승’을 예측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당연히 관심을 가질 만한 여론조사 결과만 나오면 시비가 이는데, 최근의 대통령지지도 조사가 바로 그렇다. 한쪽은 김영삼 대통령 이래 최고의 지지도라며 뿌듯해하고 다른 한쪽은 실제 지지율은 그 반의 반도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느 쪽이 맞을까? 문제는 응답률이다. 대부분 조사에 있어 응답률은 10% 남짓, 많아야 15% 정도이다. 100명에게 물으면 10명이나 15명만 대답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은 왜 하지 않을까?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할 일 없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응답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당연히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답한다. 그렇다면 현재 80% 안팎의 지지율은 무엇을 말하는가? 응답률 15%로 조사대상자 100명 중 15명이 대답했다면, 이 중 12명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3명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조사기관이야 국민 전체의 경향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아무래도 무리다. 100명 중 12명이 지지 표명한 것을 응답자 15명을 기준으로 해서 80% 지지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조사대상자 100명을 기준으로 12% 지지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지율이 아니다. 오히려 낮은 응답률이다.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적으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정부와 여당에 한마디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광이 큰 데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을 크게 보고 있다. 여기에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문제 등 정책 수혜자들 손에 돈을 바로 쥐여주거나 신분까지 바꿔 주는, 그래서 이들의 지지가 클 수밖에 없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째 적극적 지지가 이것밖에 안 되나? 열심히 고민해 주었으면 한다. 높은 지지율에 뿌듯해하기보다는 말이다.
야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적극적 반대가 낮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대안세력의 부재이다. 달리 대안이 없으니 반대를 하는 대신 무응답과 냉소로 돌아서 버리는 것이다. 지지율이 현실을 반영하느니 못 하느니 따질 때가 아니다. 스스로 못난 모습에 매질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