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통치 시기 프랑스는 돈줄이 완전히 말랐다. 그래서 1774년 그가 고민 끝에 어렵사리 재정총감으로 발탁한 인물이 리모주(프랑스 중남부의 도시) 지사 출신의 안로베르자크 튀르고(1727.5.10~1781.3.18)다. 그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농민의 무상 부역 강제 철폐, 길드제도의 폐지, 산업에 대한 자유 보장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1775년 식량 폭동의 책임을 그에게 덧씌워 1776년 결국 퇴직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주도한 프랑스 개혁도 그의 사임과 함께 수포가 됐다.
그는 대표적인 중농학파다. 그러나 중농학파들 사이에선 방계 학도 정도로 취급됐다. 그가 프랑수와 케네 같은 형이상학적인 자연질서의 개념을 신봉하지 않고 역사적ㆍ심리적 사실에 입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농학파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농업계급에만 생산성을 인정하고 순수입은 그들에게서만 발생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상공계급의 생산성까지 인정했다. 지주의 토지소유권에 대해서도 중농학파는 신의 뜻으로 치부한 데 반해 그는 이것을 인간이 만든 제도이며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파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파리시장을 지냈다. 파리대학 신학부를 마치고 22세에 수도원장이 됐으나 볼테르의 저서를 읽고 회의를 느껴 관계에 투신했다. 관계에서 그는 파리고등법원 소원관, 리모주의 지방감찰관 등을 지냈다. 볼테르 및 백과전서파와 교류하고, ‘백과전서’에 두 항목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 ‘부의 형성과 분배에 관한 고찰’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약 10년 앞섰는데, 스미스에 의해 체계화한 많은 사상(분업, 노동의 생산성, 기업의 자유, 경쟁 등)이 기술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