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소수 의견(Korea Disount: Minority Report)’이라는 제목의 분석기사를 실었다. 한국 주식 시장이 저평가된 근본 원인은 북한의 불안정으로 인한 위협보다는 한국 대기업의 지배구조 때문이라는 지적이 주된 내용이었다. 대다수 국내 자본시장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학계
지금에야 이름이 많이 잊혀졌지만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장이 키워낸 삼보증권은 1970년대까지 국내 증시의 독보적인 1등 증권사였다. 그러나 이렇게나 잘 나가던 증권사도 ‘건설주 파동’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국내 증시의 최대 암흑기로 기록된 건설주 파동은 1970년대 중동 건설붐을 타고 급등했던 주가가 1970년대 후반 갑자기 폭락했던 사태라고 정리할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1950년대 증권업계에 투신해 무려 60여 년 가까이 현업에서 증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이다. 업계 부동의 1위로 삼보증권의 오너 경영자로서 강 전회장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의 면모를 보였다. 증권업협회장을 지냈던 1990~1993년에는 당국에 ‘증시안정기금’ 조성을 제안해 혼란스러웠던 증권
‘10년 전만 해도 박현주보다 권성문이라는 이름이 더 컸다’ 금융투자업계 잔뼈가 굵은 한 인사의 말이다.
‘기업인수합병(M&A) 전문가’, ‘벤처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권성문 KTB투자증권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대기업 샐러리맨에 불과했던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거대 금융사를 비롯한 수십 개
권성문 KTB투자증권 회장은 1990년대 국내 최고의 벤처투자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KTB투자증권은 잦은 CEO교체와 실적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그의 이름도 대중의 뇌리에서 차츰 사라져갔다. 이런 가운데 KTB투자증권이 ‘3인 경영체제’라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 권 회장이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강학파의 대부’ 고(故) 남덕우 전 총리를 따라다닌 수식어 중 하나였다.
서강학파란 1960년대 미국에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배운 뒤 귀국해 서강대 교수로 활동했던 경제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높은 경제성장률을 구가하던 시기 실제 경제관료 등으로 발탁되거나 경제정책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서강학파의 이론은
영국, 미국 등 금융선진국의 자본시장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이들 시장에서는 정부관료보다는 민간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의 스토리가 많다. 불과 수십 년 전 황무지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자본시장은 초창기 정부와 철저한 계획과 육성이 필요했다. 이렇다 보니 경제관료의 영향을 떼 놓고는 우리 자본시장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금융투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주식시장의 ‘스타’로 만든 ‘바이코리아 펀드’는 판매실적 등 여러 면에서 국내 주식형 펀드의 전설로 불린다. 채권형 투자 상품이 주류를 이루던 1990년대 국내 금융시장에서 주식형 펀드로서 인기몰이를 한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바이코리아 펀드의 ‘전설’은 몇 개월 가지 못했다. 그 해 대우그룹 부도로 증시가 급락하자
‘IMF 외환위기가 배출한 증권가 스타, 한국경제에 숨통을 틔워준 인물.’
금융투자업계가 기억하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다. 현대그룹의 ‘가신’출신이었던 이 전 회장은 금융투자업계에서 불과 몇 년 만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배경은 1999년 3월 출시했던 ‘바이코리아(Buy Korea) 펀드’. 바이코리아펀드는 나오자마자 돌풍을 일으키며 3개월 만에
누군가 ‘대한민국 1위 증권사’를 묻는다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증권사의 ‘덩치’에 해당하는 자기자본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는 11월 출범을 앞둔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대우의 합병법인이다. 하지만 소비자로서는 시장점유율이 더 와 닿는다. 이 부문에서는 키움증권이 오랜 기간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비교적 최근 창업한 뒤 초고속 성장
2000년대 국내 자본시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증권사가 있다. 2000년 1월 국내 최초 100% 온라인 증권사로 출발한 키움증권이다. 대형 증권사들이 전국 영업망을 갖고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판에 컴퓨터 몇 대로 승부를 건다는 전략은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키움증권은 세간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었다. 회사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고 불과 5년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의 합병으로 증권업계 1인자가 된 박현주 회장이 지난 10년간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를 이어오고 있어 투자자들의 이목을 끈다.
11일 미래에셋그룹에 따르면 그룹의 주력계열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지난 8일 하와이의 하얏트리젠시 와이키키호텔(약 9000억 원)을 인수한 데 이어 다음 날인 9일 곧바로 미국 시애틀 중심지에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린 개척자.’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검색하면 나오는 첫 문구다.
거대자본을 필요로 하는 증권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신규 사업자의 시장진입이 어려운 분야다. 국내 자본시장에서 미래에셋증권을 제외한 주요 증권사 대부분이 대기업 계열사이거나 자본력이 탄탄한 모기업에서 뻗어
1992년 외국인의 직접투자를 허용한 뒤 한국증시는 폭발적인 성장기를 맞았다. 무엇보다 규모 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투자기법과 기업경영 행태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때로 단기자금(핫머니) 유출입에 따른 증시불안과 등 성장통을 겪기도 했지만 큰 시각에서는 증시 개방이 전반적인 증권시장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5월 말 기준 국내 유
오늘날 한국 증시의 혈관은 전 세계 금융시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주가지수가 글로벌 금융시장 이벤트에 따라 오르내리고, 투자자들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제 뉴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풍경은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약 25년 전인 1992년 1월 3일 국내 증시가 외국 자본에 개방된 결과다.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가
국내에서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증권업무의 자율화가 본격 실행된 시기다. 정부는 국내 자본시장 전면 개방을 앞두고 1988년 6월 69건의 자본시장 규제를 완화하는 ‘증권업무 자율화 방안’을 내놨다.
당시 가장 주목받은 정책은 위탁 및 인수 수수료 자율화였다.
주식을 사고팔 때 고객이 부담하는 위탁 수수료율은 해당 정책이 발표되기 이전까지 100만원
한국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의 37~38대(1988년 4월~1990년 3월) 수장을 맡은 고(故) 김영일 전 회장은 민간 부문의 경력자가 업계의 대표를 맡기 시작한 계기가 된 인물이다. 이전까지는 부흥부, 재무부 등 경제 관료 출신들이 주로 협회장을 맡았다.
김 전 회장도 경제관료 출신이지만 1983년부터 5년간 한신증권(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사
1985년 본격화된 주식시장 활황으로 국내 자본시장은 서서히 도약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잔잔한 성장을 이어오던 증시는 이 시기부터 급격한 성장곡선의 초입에 진입하게 된다.
1985년 이후 주식시장 활황은 당시 종합주가지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 이후 1985년 상반기까지 주가는 150선을 넘지 못하는 약세 국면을 보이다가 1985년
김선길 전 증권업협회장(1985~1988년)이 현직에 있었던 1980년대 중반은 대한민국 증시 역사에서 눈부신 발전의 시기로 기록돼 있다. 언뜻 생각하면 증권업협회장으로서 ‘좋은 시기’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시기였다. 급속히 성장하는 증시는 ‘쏠림’이 심했다.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어서 종합주가지수의 변동성
오호수(72) 금융투자인회 회장은 1971년 제일은행 입사를 통해 금융투자업계에 첫발을 들였다. 시작은 은행이었지만 그의 경력은 증권업계에서 더 화려하다.
오 회장은 1977년 대우증권으로 옮겼다. 그는 이 회사에 재직할 당시 법인영업의 1인자로 꼽혔다. 증권업의 영역을 넓히려는 그의 노력이 이러한 평가를 받은 배경이라는 것이 주변 관계자들의 평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