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1786~1856)는 충청도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에 터를 잡은 김씨가문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예술가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노과(老果),승연노인(勝蓮老人) 외 많은 호를 사용했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남달랐으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아 연암 박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선수 선생의 고문헌 1200여 점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기증받은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해 이전 미공개 자료까지 공개할 방침이다.
국립암센터 의사 박원서 씨는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5층 고문헌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박선수 선생의 고문헌 1208점을 기증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기증자의
우리나라 사람처럼 거울보기를 즐겨하고 또 습관화한 경우가 외국에는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곳곳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며 더러 놀라기도 한단다. 오늘날처럼 밝은 거울이 없던 시절에도 우리 민족은 자신을 비춰보기를 좋아하여 맑은 물에라도 얼굴을 비춰보곤 했나 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 선생도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
한국콜마 윤동한(71) 회장이 기업인의 관점으로 문익점 선생을 되돌아본 ‘기업가 문익점’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콜마는 윤 회장이 역사 경영 에세이 ‘기업가 문익점’을 출간했다고 4일 밝혔다. 이 책은 목화를 매개로 한반도에 거대 산업을 일으킨 문익점의 기업가 정신을 재조명하고 있다.
한국콜마를 창업해 화장
“이별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고, 특히 생이별보다 더한 아픔은 없다. 까짓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사는 결별쯤이야 고통이라고 할 게 못 된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표현한 생이별의 참혹함과 처절함이다.
인생살이에서 가족과의 생이별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생사 여부도 모른 채 누렇게 바랜 사진 속 희미한 기억만을 붙잡고 살아가던 이산가족들이 만났다
입추가 지났다. 절기로는 가을로 들어섰건만 벌건 숯이 담긴 화로를 끌어안은 듯 뜨거운 나날이다. 폭염특보도 연일 발령되고 있다. 폭염주의보는 최고기온 33도, 폭염경보는 35도 이상이 이틀 넘게 지속될 때 내려진다. 지인의 말처럼 여름은 점점 더 비대해지고 가을은 더더욱 여위어만 간다. 뜬금없이 털북숭이 인간이 털을 포기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
‘입이 원수’라는 옛말은 ‘눈이 원수’로 바뀌어야지 싶습니다. ‘말조심’보다 ‘눈조심’이 더 필요한 때이니까 말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칼럼 중 한 토막을 옮깁니다.
한마디로, ‘눈이 무슨 죄가 있나! 보이는(보라는) 걸 보았을 뿐인데, 왜 보았다고 꾸짖고 나무라고…, 그것도 모자라 치한이네 변태네 하느냐’는 억울함의 토로입니다.
구약
부채는 예로부터 동·서양에 다 있었다. 대부분 둥근 모양이었기 때문에 ‘단선(團扇)’이라는 말이 생겼다. ‘團’은 ‘둥글 단’이라고 훈독하며 ‘원형’이라는 뜻이 있다. 중국의 고전 사극에서 여인들이 들고 나오는 부채가 대부분 원형의 단선이다. 단선이 변화하여 반원(180°), 4분의 1원(90°), 3분의 1원(120°) 등 다양한 모양의 부채가 생겼는데,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중에 ‘우황청심환’(1991)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중국과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중국 동포들이 각종 중국산 약재를 ‘보따리’로 들고 들어와 한국에서 팔아 돈을 챙겨 간다는 이야기다. 이 보따리 속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우황청심환이었다. 당시 우황청심환을 비롯한 중국산 약재가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아 중국에 가
이덕일 역사학자·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확정지었다. 한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런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3년 12월 17일 첫 대통령 취임사는 “단군 성조께서 천혜의 이 강토에 국기를 닦으신 지 반만년”, 이렇게 장중한 문사(文辭)로 시작되지. 여기에 언급된 국기는 ‘나라를 이루거나 유지해 나가는 터전’, 즉 國基인데, 요즘 잘 쓰이지 않는 말이야. 국기라면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라는 노래나 ‘국기(國技) 태권도’를 떠올리는
필자는 2013년, 2014년에 세계 최대 디자인페스티벌인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 전통공예 전시를 기획하였는데 그 전시의 주제가 바로 ‘법고창신’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초정집서’에 나오는 말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전통공예의 가치는 그대로 살리면서 시대에 맞게 진화된 전통장인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은 그의 실학사상이 집약된 한문소설이다. 묵적골의 선비 허생은 10년 계획으로 공부를 하다가 아내의 성화에 중단하고 돈 벌이에 나선다. 한양 갑부 변씨(卞氏)를 찾아가 빌린 만금으로 과일 말총 등을 매점매석(買占賣惜)해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도적들을 모아 무인도로 들어간 허생은 농사를 지어 수확한 양곡을 일본 나가사키
연암 박지원은 “벗은 제2의 나”라고 했다. 담헌 홍대용에게는 “그대와 나눈 대화가 10년 독서보다 낫소”라는 말도 했다. 두보가 이백을 생각하는 시에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고 한 이후 이 말은 멀리 있는 벗을 그리는 성어가 됐다.
이덕무의 이런 글은 어떤가.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한류와 케이팝 등의 여파로 문화의 힘을 실감하는 요즘. 30여 년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몸담았던 신현웅(辛鉉雄·72) 웅진재단 이사장은 세종대왕을 떠올려 보곤 한다.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을 작곡할 만큼 언어와 음악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친 세종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던 그에게 는 단연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책이었다.
글 이지혜 기자
“또 떠나야지요. 마음 내키는 곳으로요….” ‘중국 서남부 자연·문화 유적답사기’를 지은 김종원 작가의 말이다.
김종원 작가는 고대 금속유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공학박사였다. 그러나 20여년 전 아내가 파킨슨병 확증을 받자 아내를 위해 함께 첫 여행지인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는 “조금이라도 잘 걷고 정신이 맑을 때, 세계의 여러 나라를 보여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ㆍ1737~1805)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찬탄한 사람이 있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저작물이 많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감각과 발상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독창적 문장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이론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진(晉)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이 이밀(李密)을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임명했을 때의 일이다. 이밀은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벼슬할 수 없는 사정을 간곡하게 아뢰었다. 그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4세 때 어머니도 개가해 할머니 손에 자랐다. 당시 할머니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진정표는 이런 내용이다. “신(臣)
어제가 청명, 오늘은 한식.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라지만 이 무렵의 봄은 하루가 다르다.
중국 춘추시대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굶주리며 유랑하던 시절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가 허벅지살을 베어 바쳤다. 이런 할고봉군(割股奉君)의 충성에 힘입어 중이는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한 사람인 진문공(晉文公)이 됐다. 그러나 개자추는 공신 명단
물놀이를 하다가 귀에 물이 들어간 아이가 자꾸 피리소리가 들리자 친구에게 귀를 맞대고 들어보라고 한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라고 하자 몹시 실망한다. 나는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 시골 주막의 작은 방에 여러 과객이 함께 투숙했다. 한 사람이 코를 심하게 골아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흔들어 깨우고 “코 좀 골지 말라”고 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