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부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 A사(수탁기업)는 2012년 12월 1일 대기업인 B사(위탁기업)로부터 50억 원의 하도급(납품) 대금을 받고 제조 위탁을 받았다. 이후 2년여가 지난 2014년 12월 1일 B사는 A사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단가 인하를 합의했다. 문제는 B사가 그동안 단가가 너무 높았다며 인하한 단가를 합의 시기보다 앞선 2013년 12월 1일부터 소급적용해 애초 계약 대금보다 5억 원이 적은 45억 원만 지급하면서 발생했다. 양사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단가 인하를 합의한 경우라도 인하한 단가의 적용은 합의일 이후 발주분부터 적용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또 설령 A사가 인하한 단가를 소급 적용키로 합의했다 하더라도 B사의 일방적 행위는 법률상 부당한 대금 감액 행위에 해당하는 위법 행위다. 그럼에도 A사는 냉가슴 앓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납품 계약을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태생부터 약자이자 대기업과의 계약 관계에 있어 철저하게 ‘을’의 위치에 있는 중소기업의 이러한 속앓이가 차츰 개선할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계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납품대금 연동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정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이 4일부터 시행에 들어가서다.
납품대금 연동제는 계약 기간에 주요 원재료 등의 가격이 변동하면 이를 납품대금에 반영하도록 조정하는 것이 골자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해외 원자재 가격이 급등함에도 대기업이 이를 중소기업 납품대금에 제대로 반영해주지 않아 중소기업계의 어려움이 거듭하자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로부터 14년이 걸려서야 상생협력법이 개정됐다. 또 올해 6월에는 납품대금 연동제 도입을 위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제도의 실효성을 더욱 높일 것으로 기대됐다.
제도 도입의 제기부터 시행까지 소요된 시간이 반증하듯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중소기업계의 불공정 계약 관행은 계속됐다. 일각에선 납품대금 연동제가 시장경제에 무리하게 개입해 수탁기업의 도덕적 해이나 기업 경쟁력을 오히려 약화할 것이란 우려를 내비쳤다. 또 다른 한쪽에선 이 제도가 도입되면 공장의 해외 이전을 비롯해 상승한 납품대금 반영에 따른 제품 가격 인상에 결국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리란 논리를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불만은 올해 2월 있었던 ‘납품대금 연동제 현장안착 TF’ 발대식에 중소기업중앙회를 제외한 경제5단체가 불참하는 행태로 이어졌다.
대ㆍ중견기업계의 우려가 있음에도 법안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시행에 이르렀다. 더욱이 대·중소기업 ‘상생’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참여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9월 26일 현재 납품대금 연동제를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동행기업에 신청한 기업은 6533개사에 이른다. 이들 중 위탁기업은 327개사, 수탁기업은 6206개사로 애초 연말까지 목표로 한 것보다 3개월 앞서 6000개사를 돌파했다. 이를 달성하기까지 중기부는 8개월간 기업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한편 143회의 로드쇼를 개최하며 연동제를 현장에 알리는 것에 집중했다고 한다. 납품대금 연동제 주무부처인 중기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로, 목표치 달성에 안주하지 않고 동행기업 모집에 더욱 힘쓸 필요가 있다.
납품대금 연동제가 시행되더라도 대다수 중소기업은 여전히 위탁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을의 자리에 있다. 이 제도가 대·중소기업 간 기울어진 운동장이 조금이나마 개선될 수 있는 초석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