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일 새해 아침을 고종황제와 영친왕의 묘소인 홍유릉 참배로 시작한 이 행장은 "이번 홍유릉 방문을 계기로 우리은행의 뿌리와 설립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며 "고객과의 신뢰를 더욱 깊고 두텁게 만들기 위해 올 한해 정성과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은 우리나라 역사 최초의...
이원덕 우리은행장은 새해 첫날인 1일 임원진과 함께 고종황제와 영친왕의 묘소인 홍유릉을 참배했다고 밝혔다. 우리은행 경영진은 우리은행의 뿌리와 설립 이념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매년 홍유릉을 참배해 왔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주식회사다. 고종황제는 1899년 민족자본 육성을 통한 국가...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하고 그녀의 오빠들(의친왕, 영친왕)은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해 수차례 궁궐 탈출을 시도하였고,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는 내용에 이르면 어린 학생들에게 이 허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어지는 역사는 훨씬 임팩트 있게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고종 황제, 황태자 영친왕이 실제 생활했던 궁궐로 △1897년 국호 대한제국 선포(즉조당) △1905년 을사늑약 체결(중명전) △1919년 고종 승하(함녕전) 등 한국 주요 근대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덕수궁관리소에 따르면 올해 1~6월 덕수궁 누적 관람객수는 약 47만 명으로 지난해 동기간 대비 3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 코로나19 지역 감염 확산 방지를...
할인 대상은 70인조 오케스트라가 영화 사운드트랙을 동시에 실연하는 공연인 '필름콘서트Ⅱ-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서울시무용단 단원들이 직접 안무에 참여해 뉴트로국악에서 일렉트로닉까지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더 토핑', 조선의 마지막 왕자인 영친왕의 실화를 소재로 한 합창 뮤지컬 '왕자와 크리스마스', 서울시뮤지컬단의 송년 가족 뮤지컬 '애니' 등...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이오 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구는 이곳에서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를 만나 결혼했다.
페이는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 중 2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영친왕(英親王)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질로 끌려간 그는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 정략결혼해 일본군 장성을 지냈다. 광복 후 두 차례 환국 요청은 미 군정과 정부가 결사적으로 반대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패망 후 평민으로 격하당했다. 그가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아내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한 말. 그는 오늘...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사당 ‘덕안궁’으로 사용되던 옛 국세청 별관 부지에는 1937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를 건립, 1978년엔 국세청 남대문 별관으로 이용됐다.
서울시는 국세청 별관 건물 철거를 위해 당시 소유자였던 국세청과 협의해 2014년 국세청 별관 부지와 청와대 사랑채 내 서울시 부지 교환을 결정했다.
서울시는 광복...
옥중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열사는 이듬해 4월 이왕세자(영친왕)가 도쿄(東京)에서 결혼하는 것을 기념해 1년 6개월로 감형됐지만,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한다.
유관순 열사 생가는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 당시 일본 관헌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빈터만 남은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했으며, 봉화 터와 함께 사적 230호로 지정됐다. 생가...
이들은 1963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함께 귀국, 서울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줄리아는 이곳에서 낯선 궁궐 생활과 종친들의 외면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종친회는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하지 않았고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구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줄리아와 이구는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일본에서는 도쿄의 영친왕 이은(李垠)이 거처하던 집에서 생활하면서 일본 황족이나 귀족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1년 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서거하고, 1929년에는 생모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梁氏)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조발성 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명휘원의 설립자인 이방자 여사가 바로 우리은행의 전신이자 최초의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의 2대 은행장 영친왕의 부인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는 남편 영친왕의 호 명휘(明暉)를 따 명휘원을 설립하고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고통 받는 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또 영화의 중심이 되는 ‘영친왕 망명사건’ 대신 ‘덕혜옹주 구출 작전’이 등장한다는 차이가 있다.
다만 소설과 영화 모두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황실 미화라는 시선을 받고 있다. 권비영 작가는 이에 대해 “황실 미화라는 부분에 있어 논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은 일방적으로 황실을 비하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영화에선 영친왕을 망명시키기 위해 덕혜옹주까지 나서 구출 작전을 돕는다. 덕혜옹주는 재일 조선인 노동자 앞에서 선동도 한다. 영화는 조선 왕족을 미화한다. 무력하게 나라를 빼앗겼고 그 후 단말마적인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못난 왕족을 영화는 눈감아 버린다. 감독은 그리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덕혜옹주’는 벌써 관객 수 500만 흥행 기록을 향해 치닫고 있다....
6살에 2대 은행장에 올랐던 옹주의 오라버니, 영친왕은 ‘정미7조약(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 행했던 마지막 조치)’이 체결된 190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은행장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망국의 울분과 광복의 열망이 ‘우리은행 뿌리’인 셈입니다.
이 같은 인연 때문에 우리은행에서 보는 영화 흥행은...
영친왕 이은(1897.10.20~1970.5.1)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친왕(親王)은 본래 황제가 귀비나 후궁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그의 어머니는 귀비(貴妃) 엄씨이다.
1907년에 11세 어린 나이로 황태자가 되지만 친일 인사로 만들려는 일본의 계략으로 그해 12월 도일하게 된다. 1915년 일본 왕실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거치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그...
영친왕 부부는 할 수 없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황족의 복권을 두려워한 정권이 끝나고서야 정부 초청으로 귀국해 한국 국적을 얻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이 2대 은행장이라고 하네요. 120년 가까운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시나요?
그 후 대한천일은행은 경술국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고난의 시간을 보냅니다. 1910년 일제 탄압 때문에 사명에서 ‘대한’이란 이름을 지워야 했고요.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자마자 북한군 폭격으로 종로와 인천지점을 잃었습니다....
고종황제의 근대화 사업에 따라 1899년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됐고 대한천일은행의 2대 은행장이자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도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이광구 은행장은 "우리은행이 가진 장점은 역사적 가치와 그 가치를 실천하려는 임직원의 투철한 사명감"이라며 "이 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와 감정을 잊지 말고 우리은행...
해방 후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됐다가 민간에 매각됐고,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복원에 들어가 2010년 8월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1월의 마지막 날 중명전을 찾았다. 1호선 시청역에 내려 고즈넉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500미터를 걸으면 정동극장에 다다른다. 그리고 조그만 표지판을 보고 좁은 골목 쪽으로 서울에서 이름난 추어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