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후입선출은 공간의 물체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구의 초기 생명체는 오늘날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 원핵생물이었을 것이고 그 뒤 단세포 진핵생물, 다세포생물이 등장했다. 만일 지구가 가혹한 환경으로 바뀌어 대량 멸종이 시작되면 그 순서는 다세포생물, 단세포 진핵세포, 원핵생물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기억 역시 후입선출의 패턴을 보인다. 얼핏 생각하면 최근의 일을 더 잘 기억할 것 같지만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지고 특히 치매 같은 인지장애가 생기면 가까운 일들을 먼저 잊고 끝까지 남는 건 어린 시절 기억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사람의 뇌 가운데 늦게 진화한 부위가 가장 먼저 노화한다는 내용이다.
약 700만 년 전 공통조상에서 침팬지와 갈라져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은 인류는 약 200만 년 전부터 뇌가 급팽창해 지금은 침팬지 뇌 용량의 3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과정은 풍선을 불 때처럼 뇌의 모든 영역이 비례해서 3배로 늘어난 게 아니라 거의 차이가 없는 부위도 있고 5~6배 늘어난 부위도 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높은 인지능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두엽이 바로 급팽창한 영역이다.
독일 하인리히하이네대가 주축이 된 다국적 공동연구자들은 침팬지 189마리와 사람 304명의 뇌 자기공명영상 스캔 데이터를 분석했다. 원래 사람은 480명의 데이터가 있었지만 침팬지 데이터의 최고령이 50살이라 이에 해당하는 사람 나이인 58세가 넘는 데이터는 제외했다. 즉 중년까지 데이터를 비교해 분석했다.
연구자들은 뇌를 17개 영역으로 나눈 뒤 신경세포(뉴런)가 몰려 있는 회백질의 상대적인 부피 변화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의 뇌에서 급팽창한 영역인 안와전두피질의 회백질이 가장 빨리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두엽을 이루는 다른 부위인 중간전두피질, 내측전두피질의 회백질도 노화가 빨랐다. 반면 팽창 정도가 평균에 못 미치는 측두엽과 후두엽, 운동피질과 피질하 영역 등은 회백질이 줄어드는 정도가 덜했다. 이처럼 고등 인지능력에 관여하는 부분이 먼저 늙는 건 지나치게 사용해서이거나 급히 진화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취약성을 지닌 결과로 보인다.
이번 결과가 흥미로운 점은 인지력의 저하가 뚜렷이 드러나는 노인의 뇌는 포함하지 않고 중년까지의 노화 패턴을 분석했다는 데 있다. 즉 인류의 여정에서 뒤늦게 진화한 고등 인지 영역이 노화에 취약해 먼저 기능을 잃을 수 있고 그 결과 노년이 되면 인지력이 크게 떨어지며 알츠하이머병 같은 신경퇴행성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커진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 뇌의 급팽창 영역은 조현병(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곳의 뇌 회로가 복잡하게 진화하면서 배선에 오류가 생길 위험성도 커졌고 그런 결과가 정신질환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이 시대와 장소에 차이 없이 1% 내외라는 사실도 이런 진화론적 설명을 뒷받침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