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6일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협력 성과를 돌아보는 동시에 안보협력을 비롯한 실질적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양국은 제3국에서의 분쟁 발생시 자국민 대피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의 ‘재외국민 보호 협력 각서’를 체결하고, ‘사전 입국 심사제도’를 포함한 양국 간 출입국 절차 간소화도 추진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국을 찾은 기시다 총리와 용산 대통령실에서 오후 3시 35분부터 약 100분간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번 회담은 윤 대통령 취임 후 기시다 총리와 가진 12번째 정상회담이자, 올해 들어 열린 세 번째 정상회담이다. 기시다 총리가 이달 말 자민당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만큼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마지막 정상회담이기도 하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브리핑을 통해 “양 정상은 그간의 한일 협력 성과를 돌아보고, 양국 간 실질 협력 증진 방안과 한반도 정세, 한미일 협력, 인태지역 포함한 역내 및 글로벌 협력 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양국은 △재외국민 보호 협력 각서 △출입국 간소화 △강제동원 희생자 기록 제공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김 차장은 “세 가지 협력 사례는 지난 1년 반 동안 협력 확대를 통해 축적된 양국 간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체결한 ‘재외국민 보호 협력 각서’에는 제3국에서 전쟁 등 위기가 발생할 경우 양국이 자국민 철수를 위한 지원과 협력을 협의하고, 평시에도 위기관리 절차·연습·훈련에 관한 정보와 모범 사례 공유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해 4월 수단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당시 한일 양국이 재외국민 긴급 철수를 위해 협력한 사례를 제도화한 것이다.
김 차장은 “우리 측에서 먼저 제안했다”며 “세계 각지에서 불안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재외국민 보호 협력 각서가 양국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제도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국은 한일 국민 간 왕래가 연간 1000만 명에 달하는 현실을 반영해 ‘사전 입국 심사제도’를 포함한 출입국 절차 간소화 등 인적 교류 증진 방안을 적극 모색하기로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일본에서 실무 검토에 착수했다고 알려왔다”며 우리 정부도 일본과 협의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일본은 (제도 검토) 진도가 많이 나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가 담긴 19권의 자료를 전달받았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광복 직후 귀국하려는 재일 한국인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한 일본의 해군 수송선이다. 김 차장은 “명부 입수를 위해 수개월간 교섭을 진행해온 결과”라며 “향후 관계부처 통해 명부 면밀히 분석하고 피해자 구제와 우키시마 진상파악에 활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의 고위 관계자는 “실무 차원에서 수개월 논의되고, 어제 1차적으로 전달이 됐다‘며 ”추가 자료는 계속 검토중이다. 개선된 한일관계 기류 속 일본이 과거보다 적극적이고 성의를 가지고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어 “결국 희생자들에 위로금을 지급할 수 있는 법적인 절차가 재개될 가능성이 열리고, 정확한 희생자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회의에서 양 정상은 양국이 중단된 정부 간 협의체를 재가동하고 신규 협의체를 출범하는 등 경제안보·첨단기술·안보 분야에서 협력을 넓혀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윤 정부 들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완전 정상화와 ‘화이트리스트’ (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도 복원돼 추가적인 협력 강화 방안이 도출될지도 관심이 모였다.
아울러 양 정상은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TF를 중심으로 실질 협력 성과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가속화해 나가기로 했다. 다만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일 물품지원협정, 사도광산 관련은 없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상호 물품지원협정은 추진되는 바가 없다”며 “사도광산 등재는 치열한 협의와 합의를 통해 7월에 일단락됐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기시다 총리와의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한일 관계에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있다”면서 “더 밝은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 지속될 수 있도록 양측 모두가 전향적인 자세로 함께 노력해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함께 힘을 모은다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한일 관계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 두 사람의 견고한 신뢰를 기반으로 크게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총리님과 함께 일궈온 성과들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가장 의미있는 일이었다”며 “경제와 안보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정부 간 협의체들이 모두 복원됐고, 활발한 소통과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 한일 간, 한미일 간 협력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양국 협력의 긍정적 모멘텀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태풍 산산으로 발생한 인명과 재산 피해에 대해 우리 정부와 국민을 대표하여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며 “재해 지역의 빠른 복구와 일상 회복을 기원하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도 했다.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이 광복절 발표한 ‘8‧15 통일독트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국제사회 전체에 있어서도 큰 이익”이라며 “8·15 통일 독트린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으로 이어지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이어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에서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지지한 바 있다”며 “이번 윤 대통령의 독트린도 이 목표를 향한 관심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기시다 총리는 “일본 정부가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김대중 오부치 공선 포함 역대 내각 역사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가혹한 환경아래 많은 분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슬픈 경험을 하신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유감을 표했다.
이어 “여전히 양국 간 어려운 현안 존재하나 양국관계 발전과 병행해 전향적 자세로 하나씩 해결해나가고자 한다”며 “양국의 미래 평화 번영을 위해서 지도자는 인내하며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의 다음 총리가 누가 되든 한일관계 중요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한일관계를 위해 도와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양 정상은 소인수회담에서 양 정상이 북핵 문제 대응 방안을 위해 한일‧한미일 간 협력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캠프데이비드 발전방안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김 차장은 “특히 북한의 각종 도발에 대비한 양국 간 공조 강화를 이야기했고, 북한이 러시아를 뒷배 삼아 도발하지 못하도록 대비 태세를 유지하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양 정상 간 마지막 정상회담은 실무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식적인 공동성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