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를 민간보험사에 제공하면 ‘의료 민영화’의 시초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건강보험 빅데이터 개방저지 공동행동(공동행동)’은 19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일평생 축적된 국민의 개인정보가 민간 보험사에 넘어가면 의료의 민영화와 영리화를 피할 수 없다”라며 “정부가 자본의 이윤추구를 돕고자 국민의 건강과 의료를 버리려고 한다”고 규탄했다.
이날 출범한 공동행동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노동조합을 비롯해 양대노총, 환자단체, 진보정당들이 참여했다.
국민건강보험에 축적된 데이터량은 민·관을 통틀어 최대 규모로 꼽힌다. 전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으며, 국내 모든 병원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에 적용된다. 이 때문에 국민건강보험은 개인의 병력, 진료, 수술, 의약품 처방은 물론이고 소득과 재산, 가족관계 등 상세한 신상정보를 망라한다.
지금까지 국민 건강 관련 데이터는 공익·학술 목적의 연구에 제한적으로 활용됐다. 연구자들이 신청하면, 익명화된 형태로 일부 데이터가 제공됐다.
국민건강보험과 유사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2014년부터 2017년 사이에 민간보험사의 요청에 따라 데이터를 제공했다. 하지만 2017년 국정감사에서 질타를 받고 제공을 중단했고, 이후 2020년 개인정보보호법 개정되면서 2021년부터 다시 민간보험사들의 데이터 제공 요청을 승인하고 있다.
민간보험사들은 ‘보험상품 연구·개발’과 ‘헬스케어 서비스 개발’ 목적으로 활용하겠다며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 제공을 요청하고 있다. 아직까지 민간보험사가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를 획득한 사례는 없지만, 윤석열 정부의 규제 완화 및 디지털헬스케어 산업 육성 기조와 맞물려 제공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노조와 환자들은 빅데이터 개방으로 인한 국민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김철중 국민건강보험공단 노조위원장은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는 대표성·완결성이 갖춰져 있고, 개인의 진료를 에피소드 단위로 분석하거나 건강검진 결과와 결합할 수 있어 심평원 데이터와 질적 수준과 가치가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 김 위원장은 “민간보험사가 이런 데이터를 손에 넣으면 보험 가입 거절, 보험금 지급 거절, 보험료 인상으로 인한 피해가 증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라며 “그럼에도 정부는 보건의료 혁신과 국제협력 강화 정책을 내세워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를 민간보험사에 제공하라고 압박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환자 목숨을 두고 흥정하고, 항암 중인 환자를 대상으로도 치료비 지급을 거절하는 민간보험사들이 연구 목적을 주장하며 데이터 제공을 요청하는데,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라며 “환자들이 청구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명백하다”고 날을 세웠다.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 개방이 공보험을 위축시키고, 미국식 의료민영화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민간보험사들이 자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보험 상품을 설계하면, 국내 보험시장은 국민건강보험이 지출을 효율적으로 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악화한다는 것이다.
류기섭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실손보험이 제2의 건강보험으로 자리잡으며 비급여 진료와 가계의료비 지출을 증가시켰고, 건강보험 보장성은 제자리 걸음이다”라며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를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행태는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공공성과 전면으로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민 대다수는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 개방에 반대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공동행동이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2일까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에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1015명 중 75%는 민간보험사에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반대 이유 가운데는 ‘국민 개인정보를 민간 기업이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49.3%로 가장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