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마음열고 야당은 유연해야
고초 감내하려는 총리의지 절실해
국무총리의 정치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다. 헌법에 명기되길 그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국무회의의 부의장”이다. 단순한 수동적 관료에 머물기엔 총리의 헌법적 권한이 너무 크다. 국회 인준을 요하는 원천적 정무직이다. 그러므로 정치 경력이 없었더라도 총리가 된 후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국정 난맥이 심각한 요즘엔 특히 그렇다. 주지하듯이 대통령의 국정 리더십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한 긍정 여론은 20%대에 머문다. 국회 다수 의석을 점한 야당들의 정치 공세는 대통령의 의제마다 찬물을 끼얹고 있다. 국회는 원 구성 합의 실패로 반쪽만 열려 파행을 거듭하고 있고, 그 불똥은 행정각부에 튀고 있다. 정치권의 양극화와 정치충돌의 증폭은 국정을 마비시키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대통령, 여당, 야당이 절망스러운 갈등의 늪에 갇혀 있는 만큼 무언가 다른 실마리나 탈출구가 필요하다. 국무총리가 그 역할을 할 순 없을까.
역대 총리를 보면 관료, 법관, 학자 출신이 여럿 있으나 정치인 출신이 가장 많다. 민주화 이후 6공화국만 봐도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이해찬, 한명숙, 이완구, 이낙연, 정세균, 김부겸 등 굵직한 정치인이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만큼 총리의 정치력을 요했던 시기가 많았다. 물론 이들이 다 정치력을 잘 행사했던 건 아니다. 정치 경력이 아닌 다른 자질이나 장점으로 총리직에 올랐으나 재임 시 정치력을 인정받았던 이들도 있다. 강영훈, 이회창, 고건 등의 예가 있다. 그러므로 시국의 정치적 해법을 위해 무조건 정치인 출신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고, 현 한덕수 총리의 정치력 부재를 정치 경력 없음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총리가 국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여야 의원들을 설득하고 정치 정상화에 이바지하려면 몇몇 조건이 필요하다. 모두가 난제다. 첫째, 대통령의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총리의 정치력 발휘를 용인할 뿐 아니라 그 범위를 넓혀주는 아량을 보여야 한다. 속 좁게 자기만 내세우는 우둔한 대통령이라면 총리의 정치적 역할이 자기를 가린다고 생각하고 권력 누수라고 경계할 것이다. 반면, 열린 마음의 현명한 대통령이라면 총리를 진정한 동료로 여기며 국정 돌파를 위해서라면 자기 대신에 총리가 나서 정치적 성과를 내는 걸 반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둘째, 야당의 유화적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총리를 관료로만 보지 말고 정치적 거래의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 야당 정치인들은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고 국정 난맥을 초래하면서 기뻐할지 모른다. 사법 리스크에 빠진 야당 최고 지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국정이 혼란스러워지길 바랄지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는 바보가 아니다. 거대 야당이 반대편을 너무 몰아대고 일방적으로 독주할 때 유권자는 국정 책임을 거대 야당으로 돌린다. 그러면 2년도 안 남은 지방선거와 3년도 안 남은 대통령 선거에서 민심의 추(錘)는 다시 반대쪽으로 갈 수 있다. 총리를 매개로 하는 적당한 정치적 타협이 대통령과의 직접 거래보다 덜 부담스러울 수 있다.
셋째, 총리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관료로 안주하면 편하겠지만 세인의 존경을 받을 순 없다. 물론 정치적 역할로 국정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온갖 고초가 따를 것이다. 양극적 대결이 정치권을 살벌하게 쪼개놓은 상황이므로 총리가 아무리 정치력을 발휘하려 해도 비아냥이나 욕만 먹기 쉽다. 별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그래도 총리로서의 소명을 잊지 않는다면 정치 혼란으로 인한 국정 위기를 좌시할 수는 없다. 대통령, 여당, 야당을 상대로 조정·협상·타협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만약 그럴 용기나 능력이 없다면 물러나는 편이 낫다. 정치력을 갖춘 총리감이 이 넓은 사회에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