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생몰년 미상)는 고려 태조의 제3비로, 충주 출신 호족인 증태사내사령(贈太師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신혜왕후, 장화왕후에 이어 고려 건국 전 태조와 혼인하였다.
태조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호족 딸들과의 혼인을 통해 후삼국 통일을 꿈꾸었다. 왕후와의 혼인 역시 그녀 집안의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충주는 한강 상류에 위치해 육로 및 수로 교통의 요지로, 개경과 한반도의 남쪽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또한 신라시대 5소경 중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이 설치된 곳이어서 경주에 버금가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지방세력이 강해 독자적 관부를 형성할 정도로 강력한 지역 통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명순성왕태후와의 혼인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다방면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왕후는 태조의 후비 29명 중 가장 많은 5남2녀의 자녀를 낳았다. 이 중 정종(定宗)과 광종, 두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며, 다시 광종의 아들인 경종, 경종의 아들인 목종이 즉위하여 국초 고려의 왕위는 그녀의 자손들로 계승되었다. 또 맏딸 낙랑공주는 신라 경순왕 김부와 혼인하여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이것이 과연 우연히 이루어진 일일까? 태조의 후비들은 저마다 태조 이후의 대권을 꿈꾸었다. 이를 위한 후비들 간의 연합도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다. 태후가 어떤 집단과 손을 잡았으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그러나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함께했던 집단을 추정해볼 수는 있다. 우선 태자 왕태는 맏아들인데도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으며 후손이 없다는 점 등으로 볼 때 혼인 전에 일찍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정종은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문공왕후, 문성왕후), 청주 호족(남원부인)과, 광종은 황주황보씨(대목왕후), 혜종의 딸(경화궁부인)과 혼인했다. 넷째 아들 문원대왕 왕정은 정주유씨(문혜왕후)와 혼인했고, 다섯째 아들은 승려이다. 둘째 딸 흥방공주도 정주유씨 원장태자와 혼인했다. 즉, 태후는 신라와 후백제, 고려 왕실, 그리고 태조의 제1비와 6비를 배출한 정주유씨, 제4비를 배출한 황주황보씨와 힘을 합쳤음을 알 수 있다. 이 막강한 연합이 고려 국초 왕위 계승을 이끌었으며, 여기에서 태후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태후는 죽은 뒤 신명순성태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광종은 951년 개성에 불일사를 창건하여 태후의 원당(願堂)으로 하였으며, 954년에는 충주에 숭선사를 창건하여 태후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