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외에도 고려 말의 학자인 이숭인의 시문집 '도은선생집'이 보물로 지정됐다. 이 시문집은 원래 금속활자로 간행됐는데, 이번 지정 대상 본은 그 후 다시 목판으로 판각한 것이다. 이미 보물로 지정된 다른 목판본과 달리 정도전의 서문 등이 포함됐다. 현재 전남대학교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이숭인의 시문뿐 아니라 '고려사...
연출을 맡은 전우성 감독은 고려사에 정통한 학자들에게 의견을 받고 이정우 작가와 함께 대본 집필에 들어갔는데요. 공동 연출자인 김한솔 감독은 “저희가 정말 고민을 많이 했고 파격적인 촬영을 했다”며 “KBS 드라마 센터 한 부지를 철거하고 엄청 큰 대형 크로마 세트장을 지었다. 귀주대첩 장면은 99%를 거기서 다 찍었다. 한국 사극 역사상 최초일 것”이라고...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고대사, 고려사, 조선사 등 전근대사 학습 내용인 '성취기준'을 3개 추가해 9개로 늘렸다. '보건' 교과에서는 '성·생식 건강과 권리'가 '성 건강 및 권리'로 고쳐졌고, '실과'에서는 의미가 불명확하다며 '전성(全性)적 존재'를 지웠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 담론을 후퇴시킨다고 우려했던 '성평등', '성소수자' 등의 용어는 삭제된 채로...
‘강감찬 골든벨’과 ‘고려역사포럼’ 등 고려사와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구민들이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인간 장기 대결 ‘신 귀주대첩, 장이요!! 멍이요!!’ 프로그램으로 관악구의 장기왕을 선발할 계획이다. 축제에서는 문화 체험존과 플리마켓, 푸드트럭, 별별 포토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도정 모토는 ‘새로운 경기 공정한 세상’”이라며 “함께 사는 대동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자들의 일방적 횡포를 제어하고 다수 약자의 억울한 상황을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기도는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서울의 외곽지역을 '경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고려사 지리지 기록에 따라 1018년을 뜻하는 10월 18일을 경기도민의 날로 지정했다.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뒤엎고 건국한 조선의 관점에서 기록된 고려사가 그렇다. 그러나 유물은 시대를 가감 없이 기억하고 증언한다. 전시장은 그 고려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유물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 아우성의 무게 때문일까, 전시장이 사뭇 다른 분위기로 다가온다. 구체적인 인물, 대표적인 사건, 시간의 연대기적 흐름을 서술하는...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정리·편찬했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한글로 엮은 ‘용비어천가’(보물 제1463호)의 서문도 그의 글이다. 그가 후학(後學)들에게 수기(修己: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음)와 겸손을 빼놓지 않으며 가르쳤던 성현의 덕목(德目)은 네 가지다. 요(堯) 임금의 윤공극양(允恭克讓:실로 공손하고 흔쾌히 양보함), 순(舜) 임금의 온공윤색...
'고려사'에도 "입하(立夏)부터 입추까지 백성들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눠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입추까지는 날씨가 무척 더웠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입추에 하늘이 청명하면 만곡(萬穀)이 풍년이라고 여기고, 이날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길하고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긴다. 또한 천둥이 치면 벼의...
‘고려사’는 1451년(문종 1)에 완성되었고, 그 근거가 되었던 자료들은 고려시대의 자료들이다. 즉 고려시대 내지 조선 초의 관점에서 그녀의 행위는 ‘효행’이었다. 그런데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그녀의 행위를 ‘열(烈)’로 보고 있다.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정조에 대한 관념이 한층...
‘고려사’에 실린 이 이야기는 평량을 주인공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평량의 처 역시 남편에게 동조했을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1188년(명종 18)은 무신 집권기였다. 탄탄한 신분제도를 자랑하던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1170년 무신정변이 발발하면서 크게 변하였다. 집안 좋던 문신들은 거의 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의 새로운 국왕에 오른 세자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새 국왕에 즉위한 충선왕은 아마도 조금은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 과부로 있던 김씨를 아버지의 후비(后妃)로 바쳤다고 ‘고려사(高麗史)’는 전한다. 과부였던 김씨는 이렇게 해서 숙창원비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미모는 독이...
그것은 ‘고려사(高麗史)’가 최씨를 “성질이 흉학하고 사납다”고 평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갑자기 출세한 사람들이 더 교만하고 벼락부자들이 더 탐욕을 부린 꼴이라고 하겠다.
고려의 역사에서 최씨와 같은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의민처럼 천한 출신이었다가 최고 집정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김준(金俊)의 아내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남편이 임금을...
‘고려사’(高麗史)는 소군에 대해 “나라의 제도에 궁인이 임금을 모시다가 아들을 낳게 되면, 곧 머리를 깎아 승려로 만들고 소군이라고 칭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그들이 승려가 되어야 했던 이유를 “감히 왕위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궁인 소생의 딸 역시 일반 공주와는 다른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고려의 공주들은 거의 100%에 가깝게...
이어 "(삼성이 우리 경제에 이바지한 게 크다는 식으로 정상참작을 주장하는 것도) 과거에 기여했다는 건 고려사유가 될 수 없고 최소한 재벌 개혁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신규 순환출자 해소나 일감몰아주기, 금산분리 이런 부분에 대해 삼성이 전격적인 무언가를 내놓고 모든 기업이 따를 수밖에 없는 정말 재벌 개혁을 실천하는 무언가가 나오면 모를까...
어미의 신분이 양인일 수도 있고 천인일 수도 있는데, 택주의 경우 전혀 기록이 없고, 고려사 공주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고려시대 공주는 거의 왕실 내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최충헌이 아무리 절대권력을 가졌다 해도 진짜 공주를 취할 수는 없었다. 이에 비록 서녀지만 그녀를 부인으로 취한 것 같다.
1214년 임씨와 왕씨는 각각 수성택주(綏成宅主)...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전기부터 송나라가 망하는 13세기 후반까지 135건, 4976명의 송상 입국 기사가 있다. 그러나 실제 사례나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송상이 국경에 이르면 고려는 관리를 보내 맞이하였다. 사관(舍館)이 정해진 후 장령전(長齡殿)에서 그가 바치는 물건을 받고는 그 몇 배의 고려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후 송상은 시장에서 가져온 물품을...
현문혁의 처는 ‘고려사’ 열녀전에 등재되었다. 그녀가 목숨을 버려 저항한 것은 단지 남편에 대한 신의, 겁탈에 대한 저항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인집정에게 농락당하던 왕실의 수호가 의(義)라는 생각 역시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여성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소서는 6월의 절기로 이 무렵의 15일을 5일씩 3후로 나누었는데, 초 후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중 후에는 귀뚜라미가 벽에서 살며, 말 후에는 매가 새를 잡기 시작한다고 했다.
네티즌들은 "여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소서다. 모두들 건강한 여름 나시길 바란다", "마침 장마전선 북상이라니", "소서맞이 제철 요리...
‘고려사’ 공주전에도 언급이 없다.
그녀는 병이 들어 손쓸 틈도 없이 급박하게 사망한 듯하다. 1237년(고종 24) 정유년 7월 29일 병이 들어 사당리(祠堂里)의 사제(私第)에서 운명하자, 곧 서울 남쪽의 본가로 옮겼다가, 10월 7일 강화 가릉(嘉陵·사적 제370호)에 후비(后妃)의 예(禮)로 장사지냈다. 남편 원종이 즉위한 뒤인 1262년(원종 3)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추봉되었고...
‘고려사’에는 그녀 생전에 태후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없다. 그러나 1215년 왕이 ‘태후’를 모시고 청주동궁(淸州洞宮)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보여 기사의 누락일 뿐 그녀가 태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덕태후는 태후로서의 삶을 20여 년 이상 누리다가 1239년에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덕태후’라고 하고, 곤릉(坤陵,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75, 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