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의 전신은 대우자동차다. 대우차는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2000년 최종 부도가 났다. 국내에서는 대우차를 인수할 만한 체력을 갖춘 회사가 없었다. GM은 대우차와의 기술교류의 인연으로 2002년 채권단과 인수 본계약을 체결했다.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GM은 한국지엠을 소형차 개발 본거지로 삼을 셈이었다. 그러나 2008년...
“GM대우 때까지도 대우차 분위기와 이미지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쉐보레로 브랜드가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보다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가 많아진거죠. 또 온라인이 많이 발달한만큼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고객들이 더 많이 알고 계십니다. 영업일선에 선 저희들이 더 많이 공부해야하는 것도 이때문이지요.”
한 달에 수십대의 자동차를 판매하지만 정작 그는...
심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대우차부터 마힌드라까지 10여년간 6번이나 쌍용차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 정부가 주도하고 개입했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책임을 외면한다면 노동권, 복지, 경제민주화, 내꿈이 실현되는 나라는 공염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헐값에 쌍용차를 사들인 상하이차가 정부와 산업은행의 방조 아래...
1996년 박헌수 감독, 권해효 주연의 영화 ‘진짜 사나이’에는 빨간색 대우차 에스페로 오픈카가 등장한다. 당연히 당시 대우차는 에스페로를 오픈카 버전으로 만든 적이 없다. 국산차(지금도 마찬가지다)는 물론 수입차조차 오픈카를 한국시장에 내놓기 전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에스페로 오픈카는 양산 세단의 지붕을 잘라낸 개조차였다. 당시 작업은 홍익대...
간사인 홍영표 의원은 대우차 노동자 대표였다. 김경협 의원 역시 금속노조 부천지역 상임위원을 지냈다.
무엇보다 통합진보당 소속의 심상정 의원은 서울노동운동연합 중앙위원장을 거쳤다. 야권의 의석수가 많은 마당에 목소리마저 노동계를 대변했던 의원들이 진을 쳤다.
이같은 환노위의 구성은 구태가 고스란히 이어진 국회 원구성 행태가 서려있다. 야권 의원들은...
스스로 스포츠카가 아닌 그저 ‘스포츠카로 보이는 차’를 내세웠다.
당시 소형차였던 엑셀을 바탕으로 2도어 타입으로 선보였다.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 대부분의 기술도 엑셀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의미는 크다. 국산차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포츠 버전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시장에서 맞상대는 당시 대우차 르망 임팩트였다. 1.5리터 엔진을 얹던 르망에...
홍 당선자는 대우차 용접고으로 시작해 대우차 노동자대표, 한국노동운동연구소장을 지냈다. 18대 국회에선 국회 환경노동위 간사로 활동하며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 등을 위해 앞장섰고, 정리해고에 대해 요건을 강화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19대에선 당 좋은일자리본부 간사로 다시 신발끈을 조이고 있다.
민노총 섬유노조 전문위원...
대우차는 1998년부터 100억원의 예산과 대우자동차판매, 대우통신, KTF 등과의 협력을 통해 드림넷을 개발했다. 드림넷은 별도의 단말기를 설치하면 위치 정보 안내, 도난차 추적, 간단한 생활정보 전달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었다. 모습과 기능은 GM의 온스타와 비슷했다.
그러나 드림넷의 수명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대우차가 간판을 내렸고...
이후 MVP의 부상은 줄곧 대우차의 인기 제품이 전달됐다. 제품의 덩치가 육중해 야구선수들과의 이미지가 맞았고, 성능 좋은 차들이 많이 나온 덕분이었다. 나오는 제품마다 인기가 좋았던 것도 한몫을 했다.
최동원, 선동열, 김시진, 유두열, 한대화, 문희수, 박철우 등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맵시-나, 르망, 로얄 등 대우차의 인기 모델들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김우중식 대우정신’이 깔려있기 때문에 코드가 서로 맞는다는 분석이다.
손 전 부사장의 향후 근무지가 인천이라는 점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손 전 부사장은 대우차 입사 후 줄곧 인천 부평에서 근무했다. 두산인프라코어의 본사는 인천 화수동에 있고, 엔진 개발 연구소는 인천 송도에 차려졌다. 이러나저러나 손 전 부사장은 인천에서 평생 일할 운명인...
‘대우’라는 이름과 엔진 기술 개발 고집이었다. 대우차는 1995년부터 가로형 6기통 엔진 개발에 힘써왔다. 전륜 구동 중형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가로형 엔진이 필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모든 협상이 어려움을 겪을 즈음, 이종대 당시 대우차 회장(법정관리인)은 뼈 있는 한마디를 외쳤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년 농사에 쓸 볍씨마저...
당시 라이벌인 현대차와 대우차는 각각 프레스토, 르망, 에스페로 등 세단 승용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쌍용그룹은 용어조차 생소했던 스포츠카 로드스터를 한국에 도입해 부유층 등의 새로운 소비 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전망을 내놨다.
1987년 6월 팬더 지분의 80%를 인수한 쌍용차는 이듬해 3월 팬더의 경영권을 통째로 가져왔다. 팬더의 자동차 뼈대를 한국의...
1986년 기아자동차(당시 기아산업)이 승용차 시장에 뛰어들면서 완성차 업계는 현대차와 대우차, 기아산업의 삼파전 경쟁구도가 형성됐다. 승용차 생산 노하우가 풍부했던 경쟁사와 달리 봉고를 비롯한 상용차에 강했던 기아산업은 초반부터 승용차에서 열세였다.
하지만 공학을 전공한 김선홍 회장을 중심으로 기아산업은 승용차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기 위해...
당시는 경쟁 메이커였던 대우차가 독일 오펠사의 소형차 카데트(Kadette)를 베이스로한 ‘르망’을 개발하던 때였다.
현대차도 이에 맞서기 위해 포니 엑셀에 트렁크를 갖춘 4도어 세단 ‘프레스토’를 선보였다. 이듬해 르망에 이어 기아차 프라이드가 선보이면서 마침내 현대차와 대우차, 기아차로 이어지는 본격적인‘소형차 삼파전’이 시작됐다.
삼파전에서...
대우차가 로얄시리즈를 앞세워 중형차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현대차는 포니2만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요즘이야 기본적인 기술력과 개발비만 충분히 지원되면 차 하나 개발 하는데 2년이면 족하다. 그러나 그 시절은 사정이 달랐다. 1978년부터 ‘Y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중형차 스텔라 개발에는 5년 동안 총 270억원에 이르는 개발비가 투입됐다....
그동안 현대차는 소형차, 대우차는 중형차를 특화했다. 또 기아차는 상용차, 쌍용차(동아자동차)는 특장차 부문에서 강점이 있었다.
국내 자동차회사들이 나름 해당 분야에서 특화된 노하우를 쌓았으나 일본과 미국, 유럽의 완성차 메이커에 비해서는 기술자립도와 생산능력이 많이 뒤져 있었다. 정부는 자동차산업을 보호하고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1997년 대령으로 예편한 이후 대우차 미국법인 동남 8개주 영업 총괄 매니저로 활동하며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2006년 한국닛산 대표이사로 부임해 한국 시장에 닛산과 프리미엄 브랜드 인피니티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켜 ‘마케팅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4월에는 업계 최초로 국내 완성차 업체인 르노삼성자동차 영업 및 마케팅 부사장으로...
건국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차에 입사한 서 회장은‘대기업 최연소 임원’을 단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했다.
하지만 IMF당시 구조조정으로 40대 중반의 나이에 하루아침에 백수신세가 됐다. 바이오산업의 미래를 점친 그는 2000년 인천 연수구청 꼭대기 무료 사무실을 얻어 바이오의약품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무모하리만큼 모험적인 도전이라는 말들...
소형과 준중형, 중형차 라인업에서 현대차와 대우차에 견줄 수 있는 걸출한 모델을 앞세웠다.
그러나 1980년대초부터 이미 소형차 노하우를 쌓기 시작한 현대차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기아차는 봉고에서 시작한 상용차와 RV 메이커로서의 장점을 살려 방향을 전환했다. 이것이 기아차 카렌스와 카스타, 카니발 등 '못난이 삼형제'가 등장하게된 계기다....
그만큼 왜건은 ‘짐차’ 내지는 ‘디자인이 예쁘지 않은 차’의 이미지가 강했다.
한국의 왜건 차는 1974년 기아산업이 만든 브리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후 토종 왜건 시장의 부활을 외쳤던 모델은 모두 실패했다. 1990년대 후반 현대차가 아반떼 투어링을 내놨지만 흥행 성적은 아반떼 세단을 따라가지 못했다. 대우차도 누비라와 라세티 왜건 모델을 내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