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을 비롯해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신영균 전 대우조선공업 사장 등 이른바 ‘김우중 사단’이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 김태구(81) 전 대우차 사장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김태구 전 사장은 “우리 다음 세대가 잘살기 위해 지금 우리가 희생하자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다”며 “그 뜻을 이어서 세계경영연구회가...
대표적인 모임이 수입차 업계의 ‘대우 인 카이다(Daewoo in KIDA)’다. 수입차협회(KAIDA) 회원사에 근무 중인 대우차 출신들의 모임이다.
이동호 전 대우차판매 대표는 2011년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자신의 집무실에 김우중 회장의 사진을 걸어놓으며 “우리 보스(Boss)”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도 대우그룹 공채였던 ‘대우맨’...
◇회사채 발행 제한에 자금줄 막힌 대우=승승장구하던 대우그룹은 외환위기와 함께 회사채 발행제한 규제가 나오면서 흔들렸다.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삐거덕거렸고,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며 대우그룹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내놨으나...
박정희 정부를 시작으로 5공화국까지 승승장구했던 대우그룹은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이 커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강조했으나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그룹 구조조정의 열쇠였던 대우차-미국 GM 합작 추진이...
하지만 대우그룹은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리고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며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결국, 대우그룹은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며 해체됐다.
고인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1년여간 투병 생활을 했지만, 평소 뜻에 따라 연명 치료는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우그룹 해체 후 주로...
대우그룹 공채에서 대우차로 200명 왔는데, 지금 남아 있는 사람 가운데 임원은 2명 정도 될 겁니다.”
김상원 자동차기자협회 사무국장의 뿌리는 대우다. 1994년 1월 대우그룹으로 입사한 김 사무국장은 25년 동안 홍보 업무를 맡아 오며 홍보 상무 자리까지 역임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998년 대우그룹 해체, 2002년 GM 인수 후 지엠대우를 거쳐 현재의 한국지엠까지...
당시 대우차는 경차 개발 및 생산을 위해 별도 법인 ‘대우국민차’를 출범시켰다. 차 길이(3600mm)와 배기량(당시 800cc) 등 경차 기준에 맞춰 최초의 모델 티코를 선보였다.
일본 스즈키 경차 ‘알토’를 베이스로 한 티코는 당시 200만 원 초반의 가격을 앞세워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누렸다.
차 가격은 당시 대우차 신입사원이 월급여를 꼬박 3개월을...
추가로 과거에 쉐보레(대우차 포함) 차를 구매한 적이 있는 고객과 5년 이상 된 차를 보유한 고객도 50만 원의 추가 혜택을 받게 된다.
공무원을 대상으로도 50만 원의 특별 지원이 들어간다.
볼트 EV는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적용되는 차량 2부제 의무시행에서 제외되는 만큼 많은 관심이 예상된다.
한편, 현금 지원과 장기할부가 결합한 72개월 '콤보 할부...
◇대우 레간자에 내려앉은 한국의 처마 = 이런 디자인에는 브랜드 특징이 잘 담겨 있다. 비슷한 디자인 맥락을 이어가면서 브랜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때때로 자국의 전통적 이미지를 자동차 디자인에 새겨 넣기도 한다.
국산차 가운데 좋은 사례가 1990년대 대우차 시절 출시된 중형 세단 ‘레간자’다.
당시 대우차는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1997년 대우자동차가 군산시 소룡동 국가산업단지에 공장을 세웠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방인들은 산단 주변에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소룡동과, 그 옆 나운동은 이들의 터전이 됐다. 2001년 대우차는 지엠에 팔렸지만 노동자들의 ‘지엠 조끼’는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 됐다.
2007년 현대중공업이 오식도동 국가2산업단지에...
1980년대 중반, 마이카 붐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차 등급도 △소형차 △준중형차 △중형차가 전부였다. 배기량 역시 1500㏄와 2000㏄급이 주류였다.
국내 고급차 시장은 초기 대우자동차가 주도했다. 12·12사태 이후 군사정권이 나라를 장악하면서 공업합리화 조치를 내렸다. 현대차는 소형차, 대우차는 중형차를 전담하도록 했다. 기아산업은 상용차에 집중하도록...
GM의 굴레를 벗어나려던 대우차는 중형차 ‘레간자’로 맞섰다. 디자인은 현대차 포니와 쌍용차 렉스턴을 그려냈던, 이탈리아 카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주지아로는 디자인에 앞서 ‘한국의 미(美)’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리고 한국 전통가옥의 ‘처마’를 눈여겨봤다. 주지아로의 눈에는 지붕 끝에서 살짝 치켜 올라간 ‘처마...
첫 사업권은 당시 대우조선이 따냈다. 대우차와 별도로 경남 창원에 ‘대우국민차’를 설립, 800cc(당시 기준) 경차를 개발해 내놨다. 일본 스즈키 알토의 3세대가 베이스 모델이었다.
그렇게 대우국민차 티코가 등장했다. 서울올림픽 직후 시작한 경기침체 탓에 경차는 불티나게 팔렸다. 현대차와 기아차 역시 서둘러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경차...
그 가운데 주인공이 타고 나온 빨간색 대우차 에스페로는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단순하게 색상이 특이해서가 아니다. 당시 국내 양산차 가운데 지붕을 연 오픈카는 없었다. 영화 속 에스페로는 지붕을 전기톱으로 잘라낸 차였다.
훗날 알았지만 영화 촬영 도중 이 차의 바닥이 부러졌다. 서둘러 다른 차를 동원해 도색하고 지붕을 잘랐는데 두 번째 차도 촬영...
브리샤와 구성이 비슷한 세로배치 엔진을 찾다가 대우차 로얄 프린스의 ‘밴딕스’ 엔진을 개조해 얹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기술 발달로 시대 상황 연출 가능해져 = 영화에 등장한 현대차 포니 역시 차를 다시 만들다시피 했다.
이 차는 상대적으로 연식이 좋은 포니2를 구해 구형으로 개조했다. 겉모습은 포니지만 실내는 포니2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대차는 소형차를 전담하게 됐고 대우차(현 한국GM)는 중형차를, 당시 기아산업(현 기아차)은 상용차 전담 메이커가 됐다. 이어 동아자동차(현 쌍용차)는 특장차, 훗날 기아산업으로 합병된 아시아자동차는 군용차를 전담했다. 당시 기아산업은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가 이른바 ‘봉고차’로 불리는 원박스카를 개발하면서 회생하기도 했다.
공업 합리화 조치가...
1990년대까지 현대차와 기아산업, 대우차로 짜여진 3파전 구도는 IMF 이후 현대차가 기아산업을 인수하면서 사실상 독점적 구조로 변했다.
내수 소비시장에서 현대ㆍ기아차가 점진적으로 판매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이들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동반 상승했다. 상급단체(민노총)는 물론 전체 노동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덩치를 키운 때였다.
올 상반기...
생산 분야는 대우차 출신을 주로 영입했고 연구개발은 현대차, 경영기획은 기아차 출신이 속속 합류했다.
인도 마힌드라의 인수가 확정된 이후 합류한 신영식 전무는 국내 마케팅을 총괄했다. 신 전무는 한국3M을 시작으로 마케팅 업계에 처음 진출했다. 이후 LG패션과 CJ푸드빌 마케팅 상무 등을 거쳐 2011년 쌍용차 국내마케팅 총괄(전무)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