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향판제도, 또 하나의 야만(野蠻)

입력 2014-04-0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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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ㆍ전 청와대 정책실장

사람은 천사가 아니다. 이성과 양심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살지는 않는다. 때로 자기 생존을 위해서, 또 때로는 그저 좋아서 남의 것을 취하기도 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훼손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너와 나 모두를 위해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 공동의 규칙을 만들고 이를 운영하기 위한 제도와 시스템을 만든다. 나라를 세우고 정부를 구성해 운영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천사가 아니기에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정부는 때로 그 존립의 이유, 즉 사람이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잘못된 규칙과 제도를 만든다. 일종의 모순이자 부조리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1992년 첫 교육감 선거가 있었다. 시·도 교육위원들에 의한 간선이었다. 선출방식은 소위 ‘교황선출방식’. 입후보자가 없는 상태에서 선호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 내는 방식이었다. 과반 득표자가 없는 경우 2차, 3차 투표를 하게 했다.

문제는 교육위원의 숫자였다. 가장 적은 경우가 7명, 가장 많은 서울이 25명이었다. 자신의 표를 빼면 적게는 3명, 많게는 12명의 지지만 확보하면 학교 ‘교(校)’ 자의 ‘교황(校皇)’, 즉 교육감이 될 수 있었다.

3명의 표만 얻으면 돼? 천사조차도 욕심을 낼 만한 상황이었다. 바로 돈이 오가고 당선되었을 경우 어떻게 해 주겠다는 약속들이 판을 쳤다. 선거 후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지방교육행정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국민적 개탄에 이 제도를 만든 사람들이 변명했다. “그럴 줄 몰랐다.” 몰랐다고? 사람이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월급 받고 세비 받고 사는 사람들이 사람이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이번에는 지역법관제, 이름하여 ‘향판제도’가 문제다. 일부 법관을 길게는 수십 년 한 지역에서 근무하게 하는 제도다. 이번에 말썽이 된 ‘황제노역 판결’ 판사의 향판 생활은 장장 30년이었다.

법원의 속성상 향판에 대한 중앙통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선출직이 아니니 시민사회의 통제도 잘 먹히지 않는다. 반면 지역사회의 얽히고 설킨 인적 네트워크와 지역 엘리트 중심의 정치경제 구도는 바로 코앞에 있다. 천사조차 버티기 힘든 압력과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이번 사건이 빙산의 일각임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문제가 터진 뒤 보인 사법부의 행태도 비슷하다. 일부 향판의 개인적 일탈로 이야기하다 국민적 분노에 몰리고 몰리면서 한 마디 변명을 한다. 그럴 줄 몰랐다는 것이다. 사람이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는 사법부와 법원이 사람이 천사가 아닌 줄 이제야 알았다는 이야기다.

정말 몰랐을까? 아니다. 사람이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적절한 견제와 통제가 없으면 압박과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는 것도 인사론 책의 첫 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 알고 하는 일이다. 교육감 선거는 국회의원을 포함해 교육감 선출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사람들 간의 암묵적 동의와 유착이 만든 문제였다. 같은 맥락에서 항판제도 역시 지방 근무를 기피하는 ‘경판’과 이를 방조하는 지도부 그리고 향판의 존재로 덕을 보는 지역사회 이해관계 세력들이 배타적 지역주의를 부추겨 가며 엮어 온 것이다.

야만이다. 암묵적 동의와 유착이 만든 제도적 야만이다. 선한 의지를 가진 교육위원이나 지역 법관들까지 버티기 힘든 압력과 유혹 앞에 던져 놓는 일이 야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의 가슴 속 깊숙이 잠재해 있는 욕구와 욕망을 부추겨 부정한 일을 하게 만드는 제도가 야만이 아니면 무엇인가.

향판제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입법, 행정, 사법 안팎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담합들과 그것들이 담고 있는 야만이 모두 문제다.

사법부부터 시작하라. 이성과 양심을 중히 여기는 기구 아닌가. 법원 안팎의 이해관계가 만들어 낸 담합들과 그 속에 담긴 야만성을 덜어내는 일을 시작하라. 총도 칼도 돈도 없는 게 법원이다. 국민적 신뢰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미 많은 것을 잃고 있다. 한 번 간 눈길은 다음에도 간다. 이번의 눈길을 피하는 데만 급급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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