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신훈 우리은행 평리동지점 대리 "가족에 관한 단상"

입력 2012-09-1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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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 10년. 가족 없이 홀로 사는 나는 많은 이들에게 시간의 빚, 말의 빚 등 알게 모르게 많은 빚을 지고 산다. 나 잘나서 좋은 직장, 좋은 구두, 좋은 옷 입고 다니는 것 같지만 허세가 지쳐 쉴 때쯤엔 온전히 내 몫으로 가능한 것은 숨쉬기 정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갔었다. 요즘 곧잘 산을 오르신다는 어머니는 길거리표 아웃도어를 입고 나를 맞았다. 그 모습이 영 초라해 보여 어머니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유명 브랜드 아웃도어 매장에서 주사 맞는 초등학생처럼 뒷걸음을 치셨다. “베네통 티셔츠 사도. 베네통 티셔츠 2개 사도”라고 하셨다. 베네통 티셔츠는 ‘2개 1만8000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매장 구석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좋은 것을 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의 간청을 애써 무시했다. 아무 말 없이 비싸 보이는 놈으로 골라 입혀 드리고 나니 어머니는 온종일 혼잣말로 “이거 와 이리 뜨시노. 이거 와 이리 뜨시노”라고 하셨다.

내게는 내 일터인 은행이 주는 물질적인 부분 외에도 고마운 분이 있다. 나의 첫 팀장이셨던 개인심사부 권승수 부부장님은 신입시절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아버지의 병고로 야생마와 같았던 내게 가족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오셨다.

내가 사고로 몸을 다쳐 잠시 은행을 쉬게 되었던 어느 날이었다. 해가 쨍쨍하던 여름날, 권승수 부부장님은 ‘고개 넘어 네가 지점 앞을 지나갈 것 같아 기다렸다’고 하시며 지점 앞 도로에 한참이나 서 계셨다. 그날 내 손을 잡고 뼈 빨리 붙으라며 사주신 양지탕 한 그릇의 국물은 살아오면서 먹은 어떤 국물보다 따뜻했다.

지난 주말 홀로 두물머리 강가에 갔었다. 먼 강물을 보러 갔었는데 들풀이 눈에 띄었다. 세상 모든 것이 이름을 가져도 이름 없을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가져다 붙이지 않으면 강물은 그대로 흘러가고 들풀은 이름 없이 꽃피고 사라질 뿐이어서 평안했다. 더 나은 이름을 가지고 더 나은 형상으로 살아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던 어느 시절에는 좋고 싫은 것이 많았고 삶에 수식해야 할 것이 가득했다. 살아가는 것은 제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저 들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니 저 들풀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온전히 생을 살아내도록 한다는 것을, 오늘도 방패처럼 내려놓지를 못하던 이름 하나를 그 들풀 옆에 내려두고 왔다.

그리고 내 일터인 우리은행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존경하고 그리워하지만 눈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내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모든 것이 더 큰 의미가 될 것이라 믿는다. 힘들고 지칠 때면 좋고 싫은 것이 생겨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그런 고마운 사람들과 그들의 고마움에 대해 다시 한번 아로새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공간에서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들이야말로 나의 가족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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