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폭력의 시대’는 계속된다

입력 2010-12-10 10:59 수정 2010-12-1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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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신 유통경제부장
1997년 가을, 독일의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칼 오토 아펠 교수가 2주간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각 대학을 돌며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보기드물게 거물이었던 탓에 국내의 내로라는 지성들이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를 꽉 채웠다.

아펠 교수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20세기 독일의 지성으로 꼽히는 철학자이자 담론윤리학자이다. 하버마스와 아펠은 ‘의사소통의 합리성’, ‘합리적 의사소통 이론’을 20세기 후반기 세계 철학·사회학의 주류로 만든 철학자이다.

이중 아펠은 ‘선험화용론’이라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각각의 의사소통공동체는 선험(경험이전)적으로 획득한 인식에 의해, 이에 근거한 이상적 담론을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합의한다. 이렇게 합의된 모든 주장과 논변의 타당한 근거가 마련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모순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아펠은 이 이론을 담론의 윤리학으로 발전시킨다.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참여해서 합의를 도출하는 윤리적 실천 규범은 보편타당성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보편타당성이란 개인의 고독한 결단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합리성’이라는 동일한 기반위에 있으며 오직 의사소통공동체의 전험(前驗)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

당시 아펠의 이론은 한국 철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발생한는 경제·이데올로기적 갈등, IT·정보화 시대의 개막과 문화와 정체성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적 이론으로 높게 평가됐다. 한국의 지성인들은 아펠의 이론이 갈등과 위기에 빠진 한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찾았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10년도 훨씬 이전에 있었던 한 노회한 철학자의 강연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렇다. ‘과연 그의 이론은 현실적인가.’ 당시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분명 합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강연을 듣고 있던 많은 이들은 이런 대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이랬다. “국가간이라면 전쟁을, 한 사회 내에서라면 강압(또는 폭력)적인 방법이라도 써야겠죠.”

용산참사, 쌍용차 파업, 촛불시위, 전직대통령의 자살, 스폰서 검사, 천안함, 연평도, 사정검찰,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 구제역, 최철원, 피자와 치킨, SSM, 그리고 예산국회……. 다시 폭력이 정당화되는 시대가 됐다. 양보를 모르고 타협을 모르는 시대다. 대통령은 대화보다는 선언과 통보에 익숙해 있다. ‘행정관’인 서울시장은 의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야당성향 교육감이 마음에 안든다고, ‘정치생명’을 걸고 막겠다고 나선다.

검찰은 토끼몰이식 기업사정을 반복한다. 북한은 전쟁을 최대의 대화로 생각하고, 미국은 북을 이용해 한국을 압박한다. 한해 살림을 결정하는 ‘예산국회’는 올해도 폭력으로 얼룩졌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이어 자영업자의 삶의 터전까지 넘보고, 영세상인들은 초겨울 한파에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선다.

그럼에도 입으로는 모두 ‘상생’과 ‘대화’를 이야기한다. 이 두 단어만큼 올해 많이 회자되고 강조된 단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대화를 통해 합의했다’는 말은 잘 안들린다. ‘논쟁’은 즐기되 ‘결론’은 없다. 아펠 교수가 시인했던 것처럼 최후의 합의는 ‘폭력’을 통해 나온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21세기를 분석한 저서 ‘폭력의 시대’의 원래 제목은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이다. 세계의 미국화를 파헤친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면서 ‘폭력의 시대’라는 거친 제목으로 바뀐 것이다. 세계화도, 민주주의도, 테러리즘도 한국에서는 모두 ‘폭력’이라는 한 단어로 치환된다. 21세기 한국인은 여전히‘폭력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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