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경계에 서서

입력 2022-09-27 05:00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 원장

“어레스트, 어레스트(arrest: 심정지).”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응급실을 긴장감으로 채운다. 시끄러운 발소리, 삑삑거리는 기계음, 그리고 재빠른 의료진의 동작이 이어진다. 눈에 익은 70대 할아버지였다. 담도암으로 치료받던 환자였는데 갑자기 심정지가 온 것이다. 다행히 심폐소생술을 진행한 지 10분 만에 호흡과 맥박이 돌아왔고 의식도 회복했다. “휴!” 하고 한시름 놓는 순간,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응급실 문이 열렸다. 구조사분들이 데려온 환자는 갓 스물이 된 대학생. 바닷가로 MT를 와 수영하던 중 파도에 휩쓸렸고 구조 당시엔 이미 심장박동이 멎은 지 한참 후였다. 어찌 손쓸 틈도 없이 안타깝게 사망한 것이다. 시신를 수습하는데 커튼 옆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폐소생술로 회복된 할아버지였다.

“도대체 누가 또 날 살렸어. 누가?”

그분은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기억해보니 진료할 때면 “하나님께선 왜 나 같은 목숨을 아직 끈질기게 살려두시는지 몰라”라며 힘들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한탄하곤 했었다. 얇은 커튼 한 장 사이로 얄궂은 운명의 뒤바뀜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애통하고 슬퍼하는 젊은 대학생 가족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자신이 다시 살아난 데 대한 원망의 한이 섞인 울음소리.

의사로서 생사의 경계에 설 때면 신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물론 누군가의 삶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죽음과 또 애처로운 삶 앞에서 차라리 운명이 뒤바뀌었더라면 하는 인간적인 감정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꼬마 아이가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와 꺼이꺼이 울던 그분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그 후 멋쩍은 표정으로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힘이 느껴진다. 고통 속에서도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를 작성하지 않고 그분이 생(生)을 다시 이어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생사의 경계 앞에 섰을 때, 비록 의사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삶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선택할 수도 없다. 단지 그 생이 이어지는 동안 환자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어주는 것이, 신이 내게 허락하신 사명일 것이다.

죽음이 거쳐 간 응급실 침대 위엔 다시 새하얀 침대보가 깔렸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위에서 우릴 간절히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치료의 손길을 강력히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택은 우리의 몫은 아니란 것이다. 오직 내 몸이 허락하는 한 그들의 삶을 세상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끌어와야 할 뿐, 비록 그것이 신조차 의도하지 않은 일일지라도.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 원장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건설업계·부동산 전문가 75% "서울 아파트값 계속 오른다"…지방은 상승 "어려워"
  • 자사주 취득·소각 길 열린 고려아연…영풍 또 가처분 신청
  • 단독 예산 수십억 들였는데 참여 기업은 3곳뿐…'AI 신뢰 인증제'
  • 尹, 쌍특검법·지역화폐법 재의 요구...24번째 거부권[종합]
  • '흑백요리사' 최현석, 비장의 무기 꺼냈다…시청자들 뒤집힌 이유는?
  • “축구협회, 홍명보 감독 선임하며 내부규정 안 지켜”
  • 단독 교육부, 전국 의대에 "동맹휴학 안 된다" 공문…서울대 의대 휴학 승인 ‘논란’
  • 北, 열흘 만에 쓰레기 풍선 살포 재개…올해 들어 23번째
  • 오늘의 상승종목

  • 10.02 14:12 실시간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82,007,000
    • -2.81%
    • 이더리움
    • 3,318,000
    • -4.93%
    • 비트코인 캐시
    • 430,600
    • -5.26%
    • 리플
    • 804
    • -1.71%
    • 솔라나
    • 195,800
    • -4.91%
    • 에이다
    • 478
    • -5.16%
    • 이오스
    • 647
    • -6.1%
    • 트론
    • 205
    • -0.97%
    • 스텔라루멘
    • 127
    • -3.79%
    • 비트코인에스브이
    • 61,400
    • -6.12%
    • 체인링크
    • 14,940
    • -6.86%
    • 샌드박스
    • 338
    • -6.89%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