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의 가장 큰 불안은 핵심 공급망 리스크를 기업 차원에서 대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사업구조 특성상 양국의 투자확대, 공급망 재편 요구 중 어느 장단에 맞춰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치열한 줄다리기를 하느라 중대한 투자 결정 속도나 기술 개발이 늦어지는 동안, 미국이나 중국 경쟁사는 자국 정부의 자금ㆍ세제 혜택 지원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해 우리 기업을 위협하고 있다.
이창환 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이번 미국 정부의 공급망 설문 제출 요청과 관련해 “문항을 살펴보면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점은 분명하다”라며 “미국의 반도체 패권주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설문 대상에 포함된 기업은 제출 기한인 11월 초까지 답변에 포함할 정보 범위를 고심할 전망이다. 이 부회장은 “설문이 요구하는 자료 내용과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내부적으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도 최근 '반도체 연대·협력 협의체' 출범식에 참석해 자료 제출 여부와 관련해 "내부적 검토를 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기업으로서도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전방위적 압박이 당분간은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간 중국을 견제하며 국내 반도체 기업을 일종의 전략적 협업자 정도로 대접했던 미국 정부의 태도가 바뀐 건, 결국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때문이다. 도심 이외엔 대중교통이 활성화하지 않아 자동차 산업의 중요도가 높은 미국으로선, 강수를 써서라도 차량용 반도체를 포함한 전반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
올라 켈레니우스 다임러 CEO(최고경영자), 군나르 헤르만 포드 유럽이사회 의장 등 자동차 업계 주요 인사는 차량용 반도체 품귀가 최소 내년, 길게는 내후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이 기간 국내 기업은 경영 불확실성을 늘 떠안고 사업을 이어가야 하는 셈이다.
중국에선 광둥성, 저장성, 장쑤성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산업용 전기가 제한되면서 생산 차질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과 중국 시안에 각각 파운드리, 메모리 공장을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국내 공장을 제외하면 중국 우시·충칭에만 메모리 공장이 있다.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도 각각 광저우와 톈진에 OLED 공장을 가동 중이다.
아직 국내 반ㆍ디 기업이 입은 피해는 없지만, 대만 유니크론 테크놀로지, 콘크래프트 등 공장 가동을 멈춘 전자업체가 생긴 만큼 현지에 생산기지를 둔 기업 모두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365일, 24시간 돌아가는 반도체 공장의 경우 단 1초의 정전이 한 달 넘는 생산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당장 삼성전자만 해도 올해 초 미국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정전으로 3000~4000억 원 수준의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
이재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중국 전력난이 지속 또는 심화할 경우,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 SK하이닉스 우시 공장, 그리고 삼성전기 MLCC 천진 공장 등의 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며 “중국 동부 지역의 전력난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고 있는 만큼, 삼성전기-SK하이닉스-삼성전자 순으로 영향받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불확실성 파고 속에서 경쟁사 추격 속도도 매섭다. 반도체 부문에선 미국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인텔이 110조 원에 달하는 파운드리 투자 계획을 공언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착공에 나섰다. TSMC도 중국과 미국, 일본, 독일 등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속속 밝히며 해외 생산 능력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선 이미 선두를 내준 LCD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우세했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부문에서도 중국 점유율 확대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중국이 세계 LCD 시장에 후발주자로 나서 점유율 10%를 달성하는데 10년 가까이 걸렸지만, OLED는 6년 만에 점유율 10%를 넘어섰다. BOE, CSOT, 티엔마, 비전옥스 등 중국 기업도 OLED 증설 기반작업에 착수했다. 공격적인 점유율 확대 뒤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책이 있다. 국내 현황과 비교하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 한참 지났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주요 국가들이 이같이 긴박하게 나선 것에 비하면 우리 정부의 움직임은 아쉬운 수준이라는 게 업계 전반적인 시각이다.
미국에선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에선 시진핑 주석이 직접 나서 반도체 산업 지원 전략을 진두지휘 중이지만 한국의 경우 산업부 중심으로, 그것도 이슈가 불거지는 사업 영역에만 단기적인 전략이 마련되는 형국이다. 정부 여당이 반도체ㆍ디스플레이 등 주요 핵심 산업 지원을 위해 추진 중인 '국가 핵심전략산업 특별법'(일명 반도체 특별법)도 부처 간 이견 등으로 처리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 관련 교수는 "현재 정부가 몇 차례 내놓은 지원안 등에서 실효성 있는 대책을 찾아보지 못했다. 난제를 풀려면 여러 변수에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데 대책 대부분이 '급한 불 끄기' 식이라 안타까웠다"라며 "업계나 학계 현장 목소리를 먼저 듣고 이를 정책에 녹여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