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왕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해 체포된 뒤 사형당했다. 거사 전 김구에게 한 말이다. 그는 오늘 태어났다. 1900~1932.
☆ 고사성어 / 금지옥엽(金枝玉葉)
금 가지에 옥 잎사귀. 옛날에는 ‘임금의 자손이나 집안’을 말했으나 오늘날에는 ‘귀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많이 쓴다. 진(晉) 혜제(惠帝) 때...
4월 29일 ‘쇼와의 날(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을 기리는 날)’을 시작으로 5월 △1일 노동절, △3일 헌법기념일 △4일 녹색의 날 △5일 어린이날을 포함한 ‘황금연휴’죠.
특히 이번 골든위크는 일본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올해는 29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최장 10일을 쉴 수 있는데요, 무려 3년 만에 ‘코로나19 긴급사태’나 ‘만연 방지 등 중점조치’ 가...
앞서 코르슨스키 대사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공식 트위터에 파시즘을 상징하는 인물로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 일왕의 사진을 올리자 공개적으로 수정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왕은 전쟁 발발과 파시스트와는 무관하다”며 “이는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증시는 이날 히로히토 일왕 생일 ‘쇼와의 날’을 맞아 열리지 않았다.
중국 증시는 대체로 상승했다. 이날 상하이종합지수는 전날보다 17.83포인트(0.52%) 상승한 3474.90에 거래를 마쳤다. 선전성분지수는 전일 대비 65.7포인트(0.46%) 오른 1만4464.08에, ‘중국판 나스닥’이라 불리는 창업판지수(차이넥스트)는 0.83포인트(0.03%) 뛴 3051.42에 장을 마감했다.
중국...
1년여의 준비를 마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말 도쿄에 도착했고, 히로히토 일왕이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거사를 도모했다.
이 의사는 당일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왕 행렬을 기다렸다. 그가 나타나자 수류탄을 던졌고,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서 폭발했다. 아쉽게도 일장기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대한 일왕(日王)의 사과를 요구하면서다.
틀린 발언은 아니었다. 일본 덴노(天皇)의 진정성 있는 사과야말로 얽힌 과거사 매듭을 일거에 풀 수 있는 핵심이다. 덴노는 지난 세기 동아시아 재앙의 주체이고 책임의 꼭대기다. 1868년 유신으로 성립된 메이지(明治) 이래 다이쇼(大正), 쇼와(昭和)시대로 이어지는 동안 무쓰히토(睦仁), 요시히토(嘉仁), 히로히토(裕仁)...
2차 세계대전 중 아버지 히로히토(裕仁) 일왕 시대에 일어난 일본의 행위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 아키히토의 유년 시절은 전쟁과 피난으로 점철됐다. 일본은 아키히토 3세 때 중일전쟁을, 8세 때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1세 때 그는 일본의 패전을 지켜봤다.
정치적 권한도 없는 상징적인 왕이었지만, 그는 부친과 달리 재임...
1868년부터 1912년까지 메이지 일왕의 재위 시기 동안 쓰였으며, ‘밝은 곳을 향하여 다스린다’다는 의미가 담겼다. 일본의 왕은 생전에는 무츠히토, 요시히토, 히로히토 등의 본래 이름을 사용하다가, 사후에는 재위기간의 연호를 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그 유명한 일본 문호 개방, ‘메이지 유신’이 있다. 재위 기간 동안...
앞서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2016년 대국민 영상 메시지를 통해 “몸이 약해져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어렵다”며 생전 퇴위 의사를 밝혔다.
아키히토 일왕은 아버지 쇼와(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서거한 후 1989년 1월 즉위했다. 오는 2019년 5월 1일에는 아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즉위식이 열릴 예정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이 서거한 후 1989년 1월 즉위했다. 2019년 5월 1일 아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 즉위식에는 전 세계에서 고위 인사들이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1989년 2월 히로히토 일왕의 장례식 때는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 등 전 세계에서 수십명의 정상이 참석했다.
그는 1932년 1월 이봉창이 일왕히로히토(裕仁) 암살을 위해 던진 수류탄을 직접 만들고 폭탄 주머니를 이 의사에게 채워주었다. 같은 해 4월 윤봉길 훙커우(虹口)공원(현 루쉰공원) 의거에 함께하였으나 거사 당일 출발 직전 김구가 “두 사람 모두를 잃을 수는 없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광저우(廣州) 중산대학...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사망했을 때는 “왜 사죄도 않고 죽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배봉기는 평생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면서 살다가 1991년 10월 오키나와 자택에서 별세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재임했던 히로히토(1901∼1989) 일왕의 막냇동생인 미카사노미야 친왕이 27일(현지시간) 오전 도쿄 시내의 병원에서 별새했다. 향년 100세. 그는 지난 5월 급성폐렴으로 입원한 이후 병원생활을 해왔다.
그는 다이쇼(1879∼1926) 일왕의 넷째 아들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태어나 1943년 육군 참모로 중국 난징에 부임했으며 대본영(전시...
1946년 1월 1일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살아 있는 신’의 지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후 ‘상징천황제’는 일왕을 국민으로부터 분리하면서 ‘상징적인 신’임을 연출해 왔다. 그 제도가 일반 국민들에게도 자신의 인간적인 주장을 억제하게 했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히토는 자신의 가족, 특히...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결정을 성단(聖斷)이라는 말로 호도했다.
이러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은 7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익 단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를 담은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올해도 일본 각료와 정치인들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잊지 않았다....
히로히토 일왕은 이날 열린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 양국 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식민 지배의 상징적 존재인 일왕이 한국과 관련한 과거사 발언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나름의 의미는 컸지만 한국의 역사적 상처를 고려할 때 만족할 만한 수준의 표현은 아니었다. 일본이...
박근령씨는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裕仁·1901∼1989) 천황폐하께서 '통석의 염'이라고 이야기했다"며 "천황께서 애통한 마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며 "1993년 고노 담화가 있었고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시모토 유타로 등의 총리가 사과 말씀을 했었다. 일본 역대 총리와 천황폐하가 계속된...
군사동맹 관계로 반복해 표현했으며 “일본과 한국의 군사동맹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과거사에 관해 언급한 ‘통석(痛惜)의 염(念)’을 히로히토 일왕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한 발언으로 소개하거나 고노(河野)담화를 ‘고도담화’라고 말하는 등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하기도 했다.
관계로 반복해 표현했으며 "일본과 한국의 군사동맹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과거사에 관해 언급한 '통석(痛惜)의 염(念)'을 히로히토 일왕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한 발언으로 소개하거나 고노(河野)담화를 '고도담화'라고 말하는 등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하기도 했다.
지난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데즈카 히사시(93)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정치적인 태도가 최근 우익으로 전환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며 “아베가 과거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쟁 전 정권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다른 생존 조종사인 이와이 타다마사(94)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