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호두나무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9월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두나무의 어린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 집 뜰 안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 자리하고 있는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가 그때 심은 것인지의...
환갑잔치는 고려 충렬왕 때 시작됐지만 조선 영조 이후 성행했다. 생일보다 앞당겨서 한다. 환갑에는 자식들이 사망하는 악사(惡事)가 없어야 하는데,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2천년을 살아남은 명문 / 묵자(墨子) 소염편
“사람의 마음도 물든다.” 묵자가 실을 염색하는 광경을 보고 깨달은 ‘스승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문구....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에 이른 뒤 1296년(충렬왕 22)에 퇴직하였다. 최서는 처음에 비서감(秘書監) 민휘(閔徽)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네 명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이에 무안군부인과 재혼하였다.
무안군부인은 공손하고 삼가며 정숙하여 아내로서의 덕이 있었다 한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최중유(崔仲濡)는 정순대부 전의령(正順大夫 典醫令)이고, 2남...
1296년(충렬왕 22) 충선왕이 세자 시절 혼인하여 1298년 고려에 왔다. 그 해에 충선왕이 충렬왕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공주의 궁을 중화궁(中和宮), 부(府)를 숭경부(崇敬府)라 하였다.
충선왕에게는 계국공주와 혼인하기 전에 맞아들인 4명의 왕비가 이미 있었다. 계국공주는 그중에서도 특히 조인규(趙仁規)의 딸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질투하여 황태후에게...
1292년(충렬왕 18)에 세자 충선왕과 혼인하였다. 충선왕은 이미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으니, 1289년 혼인한 종친 서원후(西原侯)의 딸 정비(靜妃) 왕씨, 이듬해 결혼한 남양부원군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원에 체류할 때 맞아들인 몽골인 의비(懿妃) 야속진(也速眞)이 그들이다. 이후 충선왕은 1296년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백야단(白也丹·?~1297)은 충렬왕의 후궁이다. 태산군(泰山郡·현 전북 정읍) 사람인 시씨(柴氏)의 딸로서 처음에 궁인으로 입궁하였다. 일명 무비(無比)라고도 불리는데,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예전에 의종(毅宗)의 궁인에도 무비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미모로 왕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백야단을 무비라고도 부른 것은 미색과 왕의...
시조부 박항(朴恒)은 충렬왕 때 재상을 지냈으며, 시아버지 박광정(光挺)은 일찍이 귀족 자제로서 선발되어 원에 들어가 궁궐을 숙위(宿衛)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아 금부(金苻)를 띠고 소신교위(昭信校尉)가 되고, 고려 서경등처 수수군부만호 겸 광정대부 평양부윤(高麗西京等處 水手軍副万戶 兼 匡靖大夫 平壤府尹)이 되었다.
그녀는 혼인 뒤 시부모를 부모처럼...
김천(金遷)의 어머니는 고려 고종 말~충렬왕 때의 사람이다. 명주(溟州, 현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을 향리인 김자릉(金子陵)이다. 그녀는 호장(戶長) 김종연(金宗衍)과 결혼하여 김천과 김덕린(金德麟), 두 아들을 두었다.
당시는 몽골과의 전쟁기로 몽골인들은 수많은 고려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 그녀와 작은아들 역시 포로가 되어 원나라 동경...
특히 아버지 충렬왕(忠烈王)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비(無比) 일당을 의심하여 아버지가 재위 중인데도 불구하고 무비를 비롯한 아버지의 측근들을 마음대로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버렸다. 당시 세자는 쿠빌라이의 외손주로 아버지를 훨씬 능가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몽골 조정까지 개입하여 국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것을 강요하여...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아내 권씨(權氏)는 1288년(충렬왕 14) 고려 후기 최고 문벌 중의 하나인 안동 권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혈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당대의 대학자이자 최고 관직을 지낸 권부(權溥)와, 재상을 역임한 유승(柳陞)의 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가문의 화려함은 선대(先代)에 그치지 않았다.
형제자매들도 모두...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에 충선왕이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파직되었다가 1307년 복직하였다. 1308년 충선왕 복위로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지고, 1321년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최씨 부인은 정치적 격변기에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삼가고 신중하였다. 남편이 집에 온 손님을...
충렬왕이 공녀를 선발할 때 홍규의 딸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홍규는 딸을 빼내고자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여의치 않자,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성을 내어 홍규를 잡아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하였으며, 재산까지 몰수하였다. 또 그 딸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니 딸이 머리를 자른 것은 자신이며...
1294년(충렬왕 20)에 14세의 나이로 종친인 왕온(王昷)과 혼인하였다.
왕온은 옹주가 29세 때인 1310년(충선왕 2)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아들 셋과 딸 하나가 모두 어렸다. 옹주는 회안부원군(淮安府院君) 왕순(王珣), 창원부원대군(昌原府院大君) 왕우(王瑀), 낙랑군(樂浪君) 왕수(王琇)등 세 아들을 잘 가르치고 길러 모두 혼인시키고 손자도 8명이나 보았다.
그런데 하나...
정신부주(貞信府主·?~1319) 왕씨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이다. 충렬왕이 태자 시절인 1260년(원종 1)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아버지는 종친인 시안군(始安君) 왕인(王絪)이다. 1274년(원종 15) 태자비였던 정신부주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전쟁 종식을 위하여 몽골에 들어간 남편이 원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을 한 것이다. 혼인한 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1259~1297)는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1236~1308)의 왕비이다.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며, 원나라 세조의 딸로서 고려에 시집온 최초의 원나라 공주이다. 1274년(원종 15)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혼인하니 공주 나이 16세, 충렬왕 나이 39세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어 함께 귀국하자 사람들이 “백년 전쟁 끝에 다시...
그러나 태자비가 1237년 아들 왕심(王諶, 뒤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자 1244년 다시 경창궁주를 태자비로 들인 것이다. 1260년 원종이 즉위하자 경창궁주는 왕후가 되었다. 궁주는 시양후(始陽侯) 왕대(王?), 순안공 왕종(順安公 王悰), 경안궁주(慶安宮主), 함녕궁주(咸寧宮主) 등 2남 2녀를 낳았는데, 시양후는 126006년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1260년(원종 1)에 원종이...
아들(충렬왕)과 딸 하나씩을 낳고 1237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였던 이규보(李奎報)는 그녀의 죽음을 애통하는 글에서 그녀가 유순하고 고운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처음 시집올 때에는 아직 다 차지 않은 달과 같더니, 갑자기 운명하니 쉽게 이우는 꽃과 같도다[始來兮猶月未滿, 倐往兮如花易凋]”라고 묘사하고 있다. 딸의 존재는...
원(元) 간섭기에 충렬왕 부처가 원의 황태후를 만날 때조차 ‘조견’이 아닌 ‘알현’이라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시 태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태후는 1112년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명의왕태후이다. 시호를 올리는 책문에 ‘남달리 앞일을 내다보고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온화하고 거룩한 선(善)을 의(懿)라고 한다’는 시호 제정의 이유와, “큰 기업을 이어...
이에 따라 고려 충렬왕 1년인 1275년 산인선인이란 스님이 간행한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 시대 간행본으로는 현재 국내 유일본이여서 국가문화재로 지정 관리할 만하다고 판단된다는 게 시 측 설명이다.
'지리전서동림조담'은 중국 오대(五代·907∼979) 풍수사 범월봉이 편찬한 풍수지리서다. 상권 10편, 하편 14편 등 총 24편으로 이뤄졌다. 특히 조선 시대 최초의...
그가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상중에 부왕 충렬왕의 후궁을 간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탁이 백의(白衣)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패륜을 멈추라고 극간(極諫)한다. 도끼로 제 마음을 찍듯, 선비의 대쪽 같은 지조를 보여주는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1876년(고종 13년) 2월, 조선 말의 대표적인 유학자 면암 최익현(1834.1.14~1907.1.1)이 도끼를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