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값’이나 떡을 뇌물이나 권력에 비유해 언급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후락은 박 전 대통령이 로비나 상납을 통해 받았던 정치자금을 관리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채웠죠.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군부 세력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리게 되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떡’을...
‘윤필용 사건’은 1973년 4월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소장)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가 쿠데타 의혹을 받은 사건이다.
윤 소장을 포함한 측근과 관련자인 군인 10명이 구속기소되고 30여 명이 전역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 30여 명이 해직됐다.
황 씨도 사건 당시 보안수사관실로...
‘윤필용 사건’은 1973년 4월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소장)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가 쿠데타 의혹을 받은 사건이다.
윤 소장을 포함한 측근과 관련자인 군인 10명이 구속기소되고 30여 명이 전역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 30여 명이 해직됐다.
황 씨도 사건 당시 보안수사관실로...
'윤필용 사건'은 1973년 당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소장)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가 쿠데타설(說)로 번진 일이다.
이듬해 법원은 "의사 결정의 자유가 박탈될 정도의 강박 상태에서 이뤄졌다"며 전역 명령을 취소했고, 이 판결은 확정됐다.
국방부는 2017년...
이후 납치당한 김대중은 실종 닷새 뒤인 1973년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발견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납치 개입설을 부정했지만, 중앙정보부의 소행임은 동의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역시 국가 개입을 부인했고 중앙정보부가 사건의 실행을 주도했음을 인정했으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는 상공부 장관이던 1969년 '3선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후임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에 발탁됐다.
고인은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청와대로 불려간 자신이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박 전 대통령이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 아니오....
한 강남 부동산 중개인은 "원 소유자는 이후락이나 DJ나 박정희인데 자기들의 정치자금을 드러낼 수 없으니깐 박 회장 명의로 사놨다. 그래서 팔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박 회장이 과거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던 사람의 운전기사였다는 이야기부터 사채업으로 크게 돈을 번 사람이라는 설까지 그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줄을 이었다.
박 회장을...
노 의원에 따르면 비자금은 스위스 최대은행 UBS에 여러 명의로 입금됐으며,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관리했지만 실소유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비자금이 최순실과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노 의원은 “최순실은 박 전 대통령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을 세탁하려고 1992년부터 독일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기 시작해 지금은 수 백 개에...
또 북핵 타개 방안과 관련, "왜 이럴 때 북한에 특사를 파견해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느냐"며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 냉전의 상황에서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목숨을 걸고 북한에 가서 남북공동성명을 끌어내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박 시장은 정치권 일각의 개헌론을 두고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도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어려운...
작은 연못에서 붕어 두 마리가 싸우다 한 마리가 죽어 물이 썩으면서 결국엔 모두가 죽었다는 내용의 가사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권력을 다퉜던 김종필 이후락 등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그의 금지곡들은 1987년 6·29선언 직후 대부분 해금됐다. 그는 이후 1985년 ‘한계령/찔레꽃 피면’, 1987년 ‘이별 이후’ 2006년...
이어 린다김은 “첫사랑의 지인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면서 “박정희 정부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등과 만났다”고 덧붙였다.
또한 린다김은 첫사랑을 ‘김 아저씨’라고 칭했으며, 그 남성의 부친에 대해서도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재벌 회장이다”라고 표현했다.
한편 린다김은 관광가이드 정모 씨로부터 5000만원을 빌린 뒤...
하지만 7대 의원 시절인 지난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했다가 약 8년간 정치활동의 공백기를 맞기도 했다.
13대 때는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들기도 했으나 14대 민자당 전국구로 다시 원내로 돌아와 국회의장의 자리에 올랐다.
99년 7월 특검제 도입을...
대표적으로 이후락 전 중정부장의 차남과 5남이 각각 한화·SK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이 삼양인터내셔널과 연결된 것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엔 권력의 중심이 자본으로 옮겨감에 따라 정관계 가문의 인기가 떨어지고 성장 배경이나 문화적인 공감대가 유사한 재계 내에서의 혼사가 활발해졌다.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의 장녀 이인희 한솔 고문이...
박정희 정부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등과 만났다"고 덧붙였다.
또 린다 김은 “박종규와 아드난 카쇼키를 만나게 해줬다. 이를 계기로 아드난 카쇼키가 나를 한 단계 더 높게 봐준 것 같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린다 김이 펴낸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는 1969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재벌 2세를 만나 첫사랑을 느꼈다. 책에서...
윤필용 사건은 1973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물러나게 하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 게 쿠데타 음모설로 번져 윤 전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횡령과 수뢰 혐의 등으로 처벌된 사건이다.
손 전 준장도 이 사건에 휩쓸려 업무상 횡령죄,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무려 6년3개월을 중정부장으로 재직한 김형욱(1963.7∼1969.10) 전 부장은 퇴임후 미국으로 망명, 유신정권을 비난하다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이후락(1970.12∼1973.12)씨는 재임중 2인자로 군림했지만 대통령의 신임을 잃자 영국령 바하마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이후 경기도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칩거하다가 2009년 별세했다.
◇ 나라 안 역사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사망
여군학교 폐교. 3사관학교와 부사관학교에 통합
미륵사 석탑, 보수를 위해 1400년 만에 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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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당시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을 맡고 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막후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9년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봉은사 토지 매각이 결의되면서 종단 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 등은 매각을 강하게 반대했고 법정 스님 같은 인사들도 문제를 제기했다
법정 스님은 "불교회관 건립...
요정정치가 한창인 1972년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 부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 논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요정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진암 등 요정집들은 1990년대 들어 강남 등지에 룸살롱 등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오진암은 2010년에 철거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필자가 방문한 22일은 주말이라...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다시 우리 발목을 잡는 거지”(@tenelux), “비서실장 김기춘이라 해서 설마 했는데 진짜 초원복국 사건의 그 김기춘… 살아있었으면 이후락, 차지철도 청와대 데려갔을 기세”(@fatboyredux) 등의 평가를 나눴다.
그러나 황장수 미래경영연구소 소장(@Hjs3452)은 “김기춘 비서실장은 느슨해진 청와대 및 사정기관과 내각의 끈을 조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