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과의 만남, 근우회 활동은 소설가이자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강경애는 장연군청 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여 용정으로 이주한다. 이후 그곳에 거주하면서 이주 조선인의 현실을 고발한 ‘채전’(1933)과 ‘축구전’(1933), 항일무장투쟁의 공과를 여성의 삶과 연결지어 형상화한 ‘소금’(1934), ‘모자(母子)...
1927년 강향란은 강석자(姜石子 또는 錫子, 石者)라는 이름으로 근우회(槿友會)에서 활동했다. 특히 근우회 경성지회의 설립 준비와 운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간간이 행보를 엿보이던 강향란은 근우회 해체 이후 공식 지면에서 사라진다.
최초의 단발 여성으로서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고 여성성을 버렸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그녀가 단발을...
1928년 근우회 동경지부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결혼으로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박화성은 김국진의 검거 후 여성 가장(家長)으로서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1932년 이광수에 의해 다시 한 번 ‘동광(東光)’에 ‘하수도공사’(1932)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재개해 단편 ‘홍수전후(洪水前後)’(1935)...
특히 좌우합작의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1927년 5월 결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가장 열성적인 활동가 중 한 사람으로, 1929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지부 조직 강화와 강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30년대 근우회 운동이 지리멸렬하게 된 후, 그녀의 공식적 조직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주의운동이 해외나 지하로 잠적한 대신...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교 법과 2년을 수료하고, 1927년 유영준, 황신덕과 함께 근우회 발기인 및 창립준비위원으로 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숙명여고보의 동맹휴학을 지원하여 학교 당국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전문직 여성단체 망월구락부를 재출범시키는 등 사회 활동에도 힘썼으나 근우회 해체 이후에는 단체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1930년 7월...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에 최은희, 황신덕과 함께 주역이 되어 1929년까지 중앙집행위원과 정치연구부 상무위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경성여자소비조합 감사장도 담당한 그는 호남의 부호 김종필과 혼인하여 첫딸도 낳고 다복한 가정생활에도 충실하였다.
1934년 말에는 안재홍, 이종린, 여균 등과 함께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5인의 교섭위원으로...
1927년의 신간회 참여와 동시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의 사회 의식화, 빈민 구제 등 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1929년 8월 경성여자소비조합 이사도 겸하였으나, 근우회가 해체되면서 1930년대 들어 항일 활동이 주춤할 때는 신문구독 권유원으로 생활 전선에 나서 독신 가장 역할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밖에 안국동 선학원에서 뜻을 같이하는...
1927년 좌우 합작의 여성단체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5년 8월 18일 창당한 대한여자국민당(당수 임영신, 부당수 김선 이은혜)의 총무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정당인 대한여자국민당은 강령으로 ‘여성의 힘을 모아 남자만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없는 민주사회의 건설, 근로자와 여성생활을 향상시키는...
졸업 후 귀국해서도 여성과 부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대일보, 중외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조선여성동우회, 직업부인회, 근우회(槿友會) 등의 조직에 참여했다. 근우회 활동을 하면서 경성여자소비조합운동에도 참여했다. 1929년에는 임봉순(任鳳淳)과 결혼했다.
1934년 여자의학강습소를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로 만들기 위한 여자의전...
귀국 후 기자생활을 하면서 1928년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30년 근우회(허정숙)사건으로 불린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으로 검거되어 1년 6개월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출산을 위한 병보석 후 다시 수감되어 1932년 3월 만기 출옥하였다.
1934년 최창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5년 여름 난징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다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에...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이어 근우회에 이르기까지 항일 민족 투쟁과 여성운동에 심혈을 쏟았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이듬해 7월 임시대회에서 준비위원장으로, 다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조직과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0년 1월 서울지역 여학생 만세운동 사건에 배후 관련자로...
박차정은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일신여학교에 다니던 중 역시 항일운동가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과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3월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를 위해...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총망라되어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 모집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 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온갖 힘과 열성을 항일 민족 투쟁과 여성운동의 선봉에서 헌신했다.
그러던 그의 죽음은 말 그대로 시대의 큰 아픔이었으며, 민족과 여성 사회의 손실이었다. 많은 사회단체의...
1928년 1월 근우회(槿友會)의 평양지회를 조직하고 평양근우회 회관도 짓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 1930년에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여성실업장려회를 조직하여 여성의 경제적 각성과 취업 확대에도 힘썼다. 1934년 9월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그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25년 1월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5월 창립된 근우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이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는 동안 서대문 근처 맨포드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박헌영의 옥바라지를 했고 자신은 영양실조, 결핵에 시달려야 했다.
1927년 11월 임신 중이던 주세죽은 가출옥한...
1927년에는 ‘근우회’라는 여성조직이 출범했는데, 이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망라한 여성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1931년 해체되었고 한반도 내 활동공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여성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 여성독립투사로 나섰다.
제16강=신여성과 여성독립운동가, 윤정란(서강대학교)/ 자료제공=(사)역사․여성․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