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로서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위덕왕의 안위(安慰)에 대한 기원도 했을 것이다. 정략의 희생양으로 적국인 신라로 가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후궁으로 살아야 했던 다른 여형제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가호에 기댈 수밖에는 없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선조의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받길 원하여 각축전을 벌였다. 이러한 와중에 의인왕후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연유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왕후의 성품은 매우 후덕하여 후궁이 낳은 아이들을 잘 보살펴서 ‘살아 있는 관음보살’이라 불리기도 했다.
선조는 의인왕후를 매우 홀대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궁인 무비(無比, 생몰년 미상)는 고려 의종의 후궁이다. 처음에 남경(현재의 서울시)의 관비였다가 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다.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무려 3남 9녀를 낳았다. 의종에게는 장경왕후와 장선왕후가 있었다. 장경왕후는 종친 강릉공 왕온의 딸로서 1남 4녀를 낳았고, 장선왕후는 관리 최단의 딸인데...
효성왕에게는 혜명왕후 외에도 박씨 왕비와, 영종(永宗)의 딸인 후궁도 있었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歷篇)에는 효성왕의 왕비로 혜명왕후만 기록되어 있다. 혜명왕후가 효성왕의 정비(正妃)였음을 알 수 있다. 혜명왕후와 김순원 세력의 부상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하였다.
혜명왕후는 740년 3월에 당(唐)으로부터 왕비 책봉을 받았는데, 이를 통해 신라...
처음에 예종의 후궁으로 왕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세자빈 자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비로 올라간 특이한 전력을 가졌다. 1461년 장순왕후가 세자빈으로 있다가 죽고 나서 1468년 예종이 즉위할 때까지 왕실은 6년 이상을 예종의 세자빈 없이 지냈다. 세종 때 현덕왕후 권씨가 세자빈 봉씨 폐출 후 바로 후궁에서 세자빈으로 올라갔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후궁에서 세자빈이 된 사람이다. 세자 시절 문종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문종은 부인복이 없었다. 문종 자신 때문인지 아버지 세종의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부인을 세 번이나 맞아들여야 했다.
“내 뜻으로는 첩을 아내로 만드는 일은 옛날 사람의 경계한 바인데, 더군다나 우리 조종의 가법에도 이런 예가 없었던...
목종에게는 그녀 외에 후궁이 한 명 있었다. 요석택(邀石宅)에 거주하는 궁인 김씨로, 그녀의 집안은 잘 알 수 없다. 어느 때 경주 출신의 융대(融大)라는 사람이 양민 500명을 노비로 만들어 김씨와 평장사 한인경, 시랑(侍郞) 김낙 등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그녀가 왕의 총애를 배경으로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두 누이가 중국 명 황제의 후궁이었던지라 조선에 어려운 외교 문제가 닥칠 때마다 큰 역할을 도맡았다.
소혜왕후는 19세에 수양대군의 맏아들(의경세자)과 혼인했다. 혼인 직후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혼인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으면서 21세에 청상과부가 된 소혜왕후는 어린 세 자녀를 부여안고 사갓집으로...
그가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상중에 부왕 충렬왕의 후궁을 간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탁이 백의(白衣)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패륜을 멈추라고 극간(極諫)한다. 도끼로 제 마음을 찍듯, 선비의 대쪽 같은 지조를 보여주는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1876년(고종 13년) 2월, 조선 말의 대표적인 유학자 면암 최익현(1834.1.14~1907.1.1)이 도끼를 들고...
그 첫 번째가 후궁이었다. 태종이 왕실 안정을 명분으로 무려 9명의 후궁을 들이자 상심이 너무나도 컸다. 가족에게 닥친 참화도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양녕대군의 혼사 문제를 태종 모르게 아버지와 의논한 일이 화근이었다. 남동생 4명 모두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민제도 이 일로 몸져누웠다 세상을 떴다.
열여덟 살에 혼인해 서른여섯에 왕비가 된...
서태후는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으로 10대 동치제의 어머니였으며 11대 광서제의 백모로 무려 48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동치제와 광서제 모두 서태후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다가 요절했다.
청나라는 동치제 시절 30년간 자강 운동인 양무운동을 펼쳤으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무위로 돌아갔다. 특히 서태후는 청일전쟁 패배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다. 군함 살 돈을...
광해는 선조와 후궁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평온한 시절 같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끌며 종묘사직을 지켜 냈다. 선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인목왕후의 영창대군을 제치고 천신만고 끝에 조선의 19대 임금에 오른다.
실제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 세력이 결탁해 권력을 옥죄어 옴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수조란 인물은 스스로 고자가 되어 내시로 궁안의 후궁들을 일사불란하게 관리했다. 개방은 15년 동안 부모가 아파도 보러 가지 않고 제환공을 섬겼다.
그런 ‘알뜰한 당신’인데도 당대의 현명한 재상 관중은 경계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고, 죽어가면서 제환공에게 이들 간신 3인방을 내쫓으라고 신신당부한다. 자신의 자식을, 자신의 몸을, 자신의 부모를 해치고...
옹주란 왕의 후궁이 낳은 여식을 말한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은 명성황후에게서 순종을 낳는다. 이후 장 씨와 엄비에게서 이강(의친왕)과 이은(영친왕)을, 복녕당 양 귀인에게서는 덕혜옹주를 얻는다. 고종이 환갑에 얻은 딸이니 얼마나 이뻐했겠는가? 생후 50일도 안 된 갓난아이를 왕의 침전으로 데려오는 것은 왕실 법도를 무시한 행동이지만 고종은 개의치 않았다....
#고종1910년 한일합방 후 2년 뒤…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고종은 3명의 딸을 잃고 얻은 덕혜를 특별히 아꼈습니다.현재 창덕궁의 낙선재에 유치원을 만들어주기도 했죠.하지만 1919년,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보온병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1925년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갑니다.
당시 덕혜옹주 나이 14세....
친왕(親王)은 본래 황제가 귀비나 후궁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그의 어머니는 귀비(貴妃) 엄씨이다.
1907년에 11세 어린 나이로 황태자가 되지만 친일 인사로 만들려는 일본의 계략으로 그해 12월 도일하게 된다. 1915년 일본 왕실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거치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그 후 육군 중장에까지 진급한다. 1920년에는 본인 의사와...
하지만 숙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벼슬도 연고도 없는 사내가 후궁의 처소에 들다니.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냐"고 큰 소리를 쳤다.
그렇지만 이인좌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백만금(이문식 분)이 건넨 옥반지를 건넸다. 결국 "아이는 어떻게 됐냐"며 숙빈을 흔들었고,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오늘밤 해시에 와라. 한번만 내 명을 어기면...
서로의 부모님들과 주변 분들께 더욱 축복받으며 각자의 자리에서도 빛내는 부부가 되겠다”고 결혼을 앞둔 소감을 전했다.
정지민은 2010년 KBS 25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해 '개그콘서트'에서 '불편한 진실', '복숭아 학당', '후궁뎐; 꽃들의전쟁', '301 302' 코너에 출연했으며, 현재 '벼락맞은 문방구 시즌2'등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후궁을 고르고 있으니 타나실리가 원자를 낳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타아실리에게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연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타환은 황태후의 말을 따랐다. 타환은 의도적으로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실신한 상태로 드러누웠다. 타나실리는 자신을 모른 체 하는 타환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해 밖을 향해 "술을 더 가져오게"라고 외쳤다.
한편...
한편 윤진서는 오는 3월 첫 방송 예정인 ‘대박’에서 숙빈 최씨 역을 맡았다. 드라마 ‘대박’은 숙종의 후궁 숙원에게서 6달 만에 태어난 왕자가 버려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투전판에서 거칠게 타짜로 자라란 버려진 왕자 대길(장근석 분)과 영조(여진구 분)의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