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는 1912년 조선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유일한 울타리였던 아버지 고종이 사망한 이후 비운의 삶을 살게 된다.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1930년부터 몽유병을 앓기 시작했다. 1931년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해 이듬해 딸 정혜를 낳았으나 결혼 후 심해진...
할아버지 영화 촬영장에 응원 간 서우공주. 영화 덕혜옹주. 고종. 백윤식. 손녀바보. 파사랑"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사진 속 백윤식은 영화 '덕혜옹주' 속 고종 역 분장한 채 한복을 입고 입는 손녀딸 백서우 양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한편 SBS '오! 마이 베이비'는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50분 방송된다.
5일부터 7일까지 매일 오후 2시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펼쳐지는 ‘고종대 진찬연, 1892 왕의 잔치’ 는 1892년 조선 고종 즉위 30주년 및 41세 생신을 기념하는 행사 의례를 재현하고 궁중 정재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행사이다.
특별히 행사 첫 날인 5일에는 외국인 40명이 직접 문무백관이 되어 재현 퍼포먼스에 참가한다. 이들은 한국관광에 관심이 많은 국내외 거주...
“일본에 가거든 아무리 곤란한 일을 당하더라도 꾹 참고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유학을 떠나는 어린 황태자 이은(李垠)에게 아버지 고종은 이같이 당부한다. 말이 유학이지 볼모나 다름없는 아들을 보내며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일본 유학길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고초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영친왕 이은(1897.10.20~1970.5.1)은 고종의...
조선 왕실 절손(絶孫)의 간계가 숨은 정략결혼을 한 그녀는 결혼 다음 해 아들 진(晉)을 낳고 시댁인 경성에 와 할아버지인 고종을 알현했다. 8개월 된 장남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날 사망했다. 독살설이 돌았지만 일제는 배앓이라고 둘러대며 덮어버렸다. 이때부터 그녀는 조선인이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의 패망 후 이왕가(李王家)가 없어짐에 따라 평민으로 신분이...
고종 황제의 자주외교와 독립정신을 상징하고 대한제국의 재외광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 외교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다. 공사관은 2012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해오다 시설이 노후화돼 지난해 10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으며 2017년 초 재개관 될 예정이다.
한편, LG하우시스는 지난해부터 독립운동 관련 유적 및 기념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 상당한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순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후사는 없다. 그는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삶을 살았다.
태어난 다음 해 세자에 책봉됐다. 21세 때인 1895년 어머니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감금당한 창덕궁에서 들었다. 두 해 뒤 대한제국이 성립돼 다시...
덕혜옹주(德惠翁主·1912.5.25~1989.4.21)는 고종이 회갑 되던 해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고명딸이다. “회갑 해에 태어난 자식은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속담대로 덕혜옹주는 고종의 축소판 같았다. 바로 그 전해에 엄비를 잃은 고종에게 왕녀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다.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다음 날 산실에 아기를 보러 갔다...
피터 언더우드는 고종 때 조선 땅을 밟은 개신교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설립자인 호러스 언더우드의 증손자다. 외국에서 머문 시간보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더 길어 동·서양 관점에서 보는 혁신 전략을 설명했다는 것이 사장단의 설명이다.
언더우드는 책 속에서 지금까지 한국이 지켜온 성공 방정식을 과감히 버리고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나라를 판 이완용의 사진이고, 세번째 사진은 마지막 황제 고종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방송이 전파를 탄 뒤 김종민의 풍부한 역사 지식에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아둬야 겠다며 호응을 보내고 있다.
@ㅇ***인 한 트위터리안은 “유 피디님 최고다. 오늘 방송은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밝혔으며, 또 다른...
송몽규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요? 그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일찍부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죠.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으며 함께 일본 유학도 갔습니다.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제의 감시를 받고 갖은 고초를 겪다 옥사했죠. 암울한 시대 청춘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송몽규의 삶 또한 영화 '동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사각 은메달 15종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 때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오웬데니(Owen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 한 태극기를 비롯, 일제 강점기 3∙1운동 당시와 독립군과 광복군들의 맹세를 담은 태극기, 김구 선생의 친필이 새겨져 있는 태극기,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과 국군의 결의를 적은 태극기 등이 컬러로 새겨졌다. 전시가 가능한...
1896년 석방된 뒤 고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오적 (乙巳五賊) 처단을 상소하고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두 번째 체포됐다. 그는 이때 일본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불구가 됐다.
다음해인 1906년엔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돼...
영화는 생일이 석 달 이르고 죽음은 20일 늦은 고종사촌형 송몽규와 윤동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왕의 남자’, ‘사도’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전편을 흑백으로 촬영했다. 둘은 친구이자 라이벌로 설정돼 있지만, 굳이 라이벌이라고 할 이유는 없는 사촌형제였다.
윤동주 시집은 사후 3년 만인 1948년 해방공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조선 철종~고종시대 서얼 출신의 가객 안민영(安玟英·1816~?)은 1876년 스승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시가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해 우리 시조를 정리한 사람이다. 그의 매화사(梅花詞)는 스승의 집에 갔을 때 막 피어나는 매화를 보고 지은 것으로 모두 8수나 된다.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지 않았더니/눈 기약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촉 잡고 가까이...
또한 고종황제 진상품으로 알려져 있는 고종시 곶감 및 전국 유명 산지의 곶감 4종으로 만든 ‘남실바람에 말린 유명산지 곶감 세트’는 10만원, 제주도에서 임금님께 진상하던 제주 옥돔과 흑돼지로 구성된 ‘제주가 품은 보물 옥돔+흑돼지 세트’는 500세트 한정으로 15만원, 궁중 다과로 유명한 ‘궁중 꿀타래 세트’는 2만5000원 등을 마련했다.
이 밖에도...
그 해 겨울 눈 비가 많이 내리고 몹시 추워지자 태종은 사람을 시켜 외롭고 늙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과 쌀과 땔감을 보냈다.[雨雪大寒 遣中使賜孤老貧窮人千錢米炭] 이렇게 해서 민심을 수습하려 했던 고종은 사관에게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게 했다.
남송의 문인 범성대(范成大·1126~1193)의 시 ‘대설송탄여개은(大雪送炭與芥隱)’에도 설중송탄이 나온다. “눈이...
안재모가 역할을 맡은 민영익은 근대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인화가다.
1875년(고종 12년)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자 입양으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가 된 셈이다.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들이 그의 사랑에 자주 출입하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이 2대 은행장이라고 하네요. 120년 가까운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시나요?
그 후 대한천일은행은 경술국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고난의 시간을 보냅니다. 1910년 일제 탄압 때문에 사명에서 ‘대한’이란 이름을 지워야 했고요.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자마자 북한군 폭격으로 종로와 인천지점을 잃었습니다....
그가 고종이다. 아버지 3년상을 마치고도 말이 없던 고종은 긴 침묵 끝에 현자 열(說)을 발탁해 그의 도움으로 선정을 폈다. 왕이 침묵하고 있을 때 신하들이 이렇게 말했다. “사물을 잘 아는 것을 명철하다 하며 명철해야만 비로소 규범을 만들 수 있습니다.”[知之曰明哲 明哲實作則] 그런데 왕이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다는 것이다. 열은 곧 부열(傅說)이다.
시경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