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영의 너섬漫筆]준정부기관 예보가 만든 유령회사

입력 2013-06-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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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공기관의 지난해 경영평가 결과가 발표됐다. 성적표를 받아든 공공기관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장 교체 의지로 미뤄 볼 때, 이번 결과는 수장들의 진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짐작된다.

금융공기관 중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는 기관장 평가에서 A등급을 받았다. 김주현 예보 사장의 유임을 보장하지는 않겠지만, 유임 가능성을 높이는 데 보탬이 될 만한 성과다.

기분 좋은 소식이지만 예보는 웃지 못했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만신창이가 됐기 때문이다.

사실 은닉자산을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회수하려는 예보의 노력은 분명 높이 살 일이다. 그럼에도 격려보다 질타가 앞서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은 외면한 채 목적만을 추구했던 원죄 때문이다.

예보는 지난 1999년 부실금융기관인 삼양종금의 역외자산을 찾아냈다. 예보는 역외자산의 멸실 또는 은닉 가능성을 염려한 나머지 정공법 대신 편법을 택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부 승인 절차가 필요한 기관명의의 자회사보다 손 쉽게 설립할 수 있는 페이퍼컴퍼니를 직원명의로 세웠던 것. 원죄의 시작이었다.

사후 대처도 미흡했다. 외환위기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예보는 페이퍼컴퍼니 설립 사실을 늦게라도 금융감독기관에 보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예보는 스스로 보고를 포기하면서 정상 참작의 기회마저 날렸다.

예보는 찾아낸 5400만달러 중 2200만달러를 회수했다.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고 얻은 성과치고는 부실하다. 포기한 3200만달러를 포함, 역외자산 회수 과정에 대한 설명도 석연치 않다. 제기된 의혹에는 입을 꽉 다문 채 ‘(절차야 어찌됐건) 2200만달러라도 찾았으니 된 것 아니냐’며 떼쓰는 꼴이 예보답지 않다.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설립된 준정부기관인 예보가 기관 명의가 아닌 직원 명의로 유령회사를 만들어 십수년간 비밀리에 운영할 수 있었는지, 금융감독 당국은 이를 까맣게 모를 수 있었다니 모든 게 놀라울 뿐이다.

중세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작 군주론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후대인들은 이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면서 논란을 지속해왔다.

이제 예보가 해묵은 논쟁의 중심에 섰다. 공적자금 회수가 목적이라지만 그 수단으로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세운 것은 납득이 쉽지 않다. 당시 급박했던 상황논리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예보의 항변이 과연 합리화될 수 있을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지는 지켜볼 문제다.

얼마 전 주요 8개국(G8) 정상이 탈세 공조 강화를 위해 조세정보 자동교환에 합의했다. 각국의 조세협력 강화는 시대적 흐름이다. 범국가적으로 투명성을 높여 탈세에 대처하겠다고 한목소리를 내는 마당에 터져 나온 대한민국 준정부기관 예보의 유령회사 논란은 그래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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