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가장 행복한 마리아주 - 강헌 음악평론가

입력 2013-05-1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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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과 잘 익은 술을 먹고 마시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천벌은 혼자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 외로움은 섹스를 나눌 상대가 없는 것보다도 더 비극적이다. 프랑스의 속담에도 좋은 와인을 혼자 마시는 것처럼 바보같은 짓은 없다고 말한다.

값비싸고 귀한 재료와 훌륭한 요리사가 있어야만 이 즐거움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재래시장에 나가는 발품만 팔면 제철의 풍요로운 먹거리들이 널려 있고, TV 요리 프로그램은 물론 인터넷에도 아마츄어 요리사부터 프로 요리사까지의 레시피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서툴게 장을 보고 서툴게 요리해서 나누어 먹는 즐거움, 그것은 톱 레스토랑에서 엄숙하게 먹는 것보다 더욱 싱싱한 행복을 분만하게 한다.

와인이 등장하는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의미 있는 날 값비싼 와인을 딸 거라는 주인공에게 누군가가 말한다. 그 와인을 따는 날이 의미있는 날이 될 것이라고. 그렇다. 의미 있고 특별한 날에 파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파티를 하는 날이 바로 당신에게 의미 있는 날이다. 로마네 꽁티를 마시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것은 호사에 불과하다. 로마네 꽁티보다 더욱 맛있는 와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마시는 와인이다. 나의 경험으로도, 그렇다.

와인이 유행하면서 마리아주라는 말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있다. 결혼이라는 뜻을 지닌 이 프랑스어는 그 날의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을 매칭하는 것을 일컬는 말인데, 이 마리아주라는 의미가 단지 음식과 와인의 조합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날 먹을 다양한 와인끼리의 조합까지를 포괄한다. 단 하나의 메뉴, 단 한 종류의 와인만 먹고 마신다면 그것이 아무리 진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재미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캐릭터와 디테일이 삭제되고 딱 하나의 사건만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발단-전개-갈등-클라이맥스에 이르는 플롯을 가진 서사 구조처럼 네댓 코스의 메뉴를 짜고 각각의 메뉴에 맞는 그리고 그 만남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담은 와인을 하나씩 골라 짝을 맞춘다면 당신은 이미 식탁의 작가가 될 것이다. 나의 경험상 아무리 저렴한 와인이어도 어설픈 스토리가 있는 와인의 조합에 즐거워하지 않는 파티는 아직 보지 못했다.

와인은 이런 점에서 즐겁다. 우선 선택할 수 있는 브랜드와 등급이 너무 많다. 프랑스의 와인만 오만 종이 넘고 이탈리아는 이십만 종 정도 된다니, 그것들을 한국에서 전부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별의 별 이야기를 담은 와인이 끝이 없다. 그리고 종류도 드라마의 플롯처럼 단계별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산듯한 오프닝과 같은 청량함을 담은 스파클링, 아기자기한 즐거움의 디테일이 가득한 화이트, 복잡한 뉘앙스와 여운을 담은 부르고뉴 스타일의 레드와 심오하고 묵직한 삶의 무게를 담은 보르도 스타일의 레드, 그리고 모든 고난을 헤치고 나온 뒤의 행복한 결말과 같은 달콤한 디저트 와인…. 이렇듯 와인의 종류들은 유한한 삶의 단면들을 품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 간다.

와인과 음식, 와인과 와인에 이은 와인의 세 번째 마리아주는 사람과 사람이다.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먹고 마시느냐이다. 당신의 초청에 기꺼이 응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한데 어울려 하루 저녁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다섯명의 사람의 리스트가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다. 나는 이 세 번째 마리아주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마리아주라고 생각한다.

술이 쓴 이유는 인생이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의 파티에 술이 빠질 수 없다. 술을 아예 못먹는 사람도 있고 못먹게 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악마가 피곤할 때 지상에 술을 보낸다는 말도 있다.

그 모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술은 식탁의 꽃이며 쾌락의 윤활유이다. 수줍게 잔을 부딪히는 순간 우리는 조심스레 타자에 대한 문을 여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술을 마실 것인가 준비한 음식과 어울리는 술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은 여행을 계획하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 중의 하나이다. 세상은 넓고 술은 너무나 많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도 와인이 급작스럽게 부상하고 있지만 막걸리를 필두로 한 우리 술의 약진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발효 식품이 많은 우리 음식과 와인이 충돌하는 경우도 많고 보면 우리 술의 미래와 잠재력은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다. 이 좁은 한반도의 남녘에서 만들어지는 술만 한차례씩 맛본다고 해도 족히 이삼년은 걸릴 것이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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