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계에서 이름값을 높이던 그는 2009년 영화 ‘작전’에서 비중있는 조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당시 워낙 비열한 캐릭터를 맡았기에 욕도 많이 먹었다고.
지난 24일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 “그때 정말 재수 없었다”는 말부터 건넸다. 앉아 있는 의자에 쓰러지며 박장대소를 터트린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다. “한마디로 개XX였다. 하하하.”
김무열은 “당시 감독님이 정말 그렇게 주문하셨다. 정말 나쁜 놈처럼 보여야 한다”면서 “같은 맥락으로 보면 ‘은교’의 서지우 역시 정말 나쁜 놈이다”고 설명했다. ‘은교’의 서지우는 ‘작전’의 악랄한 증권브로커 ‘조민형’과 ‘활’의 지고지순한 ‘서군’이 혼재된 그런 인물이라고 덧붙인다.
출연 확정 후 대본 리딩 첫 날이었다. 함께 출연한 배우 정만식이 오죽하면 “(서지우) 진짜 나쁜 놈이구나”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단다. 김무열은 “정 선배의 말처럼 처음에는 서지우의 감정이을 이해할 수 없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빠져 너무 힘들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김무열은 “이제 겨우 세 작품 출연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힘든 영화는 없을 것 같다”면서 “특히 은교와의 정사신 촬영을 마친 뒤에는 극도의 우울감이 몰려온 적도 있었다. 집에 와 잠자리에 누었는데 ‘서지우도 지금의 나와 같았을까’란 생각에 혼자 펑펑 울었다”며 조금은 힘들어 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믿었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이적요를 향한 분노 폭발 장면이다. 당초 원작 속에서 이 장면은 서지우 혼자 슬픔을 곱씹는 것으로 표현돼 있었다. 또한 원래 시나리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제 영화 후반에 잠긴 이 장면은 달랐다.
그는 “믿었던 선생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란 생각을 해봤다. 감독님과 긴 토론 끝에 슬픔보단 분노가 맞단 결론을 내렸다”면서 “영화 속 이적요와 서지우의 갈등 폭발이 정점을 찍는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총 이틀이란 시간이 소요됐다”고 귀띔한다.
워낙 위험한 장면이라 대역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김무열은 한사코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단다. 결국 실감나는 영상이 더해져 세 사람이 벌인 감정의 파국을 살릴 수 있게 됐다.
김무열은 “사랑이 아니었을까”라면서 “이적요와 서지우는 한 집에서 10년을 함께 살았다. 그 시간 동안 이적요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랑에 더욱 목이 마른 것이다.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셨는데 더 목이 마른 것. 아마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 아닐까”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워낙 유명한 원작이고 소설 속 대문호인 이적요에 버금가는 박범신 작가의 작품이기에 출연 전 부담감도 컸을 듯하다. 또한 캐릭터의 세밀한 감정 세공 전문가인 정지우 감독의 영화 아닌가. ‘부담 백배’란 말이 어쩌면 당연한 표현이다. 캐스팅 제의 당시 기분이 어땠을까. 참고로 그의 배역은 당초 송창의가 내정된 상태였다.
김무열은 “아마 평생 배우로 살겠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나.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고 아직도 내 속에서 서지우가 떠나지 않고 있다. 그 만큼 박 작가님과 정 감독님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은 SF 영화 ‘AM 11:00’다. 물리학자 역할이다. 김무열은 “‘작전’에서 펀드매니저, ‘활’에서 양반, ‘은교’에서 공학도 출신의 문인이었다. ‘AM 11:00’를 통해 지적인 이미지에 정점을 찍겠다”며 웃는다.
악수를 나눴다. 눈앞에 그가 배우 김무열일까. 아니면 ‘은교’ 속 서지우일까. 영화 ‘은교’ 그리고 김무열 혹은 서지우와의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