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진심의 美學’

입력 2012-04-2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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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시나리오 작가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막히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내가 즐겨 하는 놀이가 있다.

시나리오의 처음부터 끝까지 씬 넘버대로 장소와 한 줄 요약 등을 적어놓고 씬의 순서를 바꾸면서 영화 구성을 재배열하는 놀이다. 하다보면 가끔 생각도 못한 기가 막힌 구성으로 완성될 때가 있다. 새 작품을 진행하면서 또 씬 넘버를 나열하고 재배열을 하는데 아무리해도 똑같은 결론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혹시 내가 신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닐까하고 깜짝 놀랐다.

지금은 영화를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국제경영학을 전공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를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꿈을 가진 청년이었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주변 모두가 얘기하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답답한 현실을 영화를 보며 풀던 그 젊은 날,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휴학을 했다. 무작정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

학연도, 인맥도 없었다. 진입장벽이 하늘처럼 높았다. 한 겨울 지하도에서의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렇게 조금씩 영화계속으로 파고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갖추어진 조건이 열악했던 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영화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난 달라야 해!’라는 채찍질을 계속 한 결과 어느 순간 충무로의 ‘살아남은 자’ 대열에 다행히 합류할 수 있었다.

최근 새로운 작품을 진행하면서 언제나처럼 계속되는 회의와 집필. 밤을 새고 또 새면서 시나리오를 쓰는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가끔 들면서 이번 작업은 유난히 원활하지가 않았다.

‘이런 곤란한 일이 있나! 금쪽같은 시간을 난 지금 어떻게 보내는 거야. 나, 프로 맞아?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라는 생각이 자꾸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히든카드 놀이를 시작했다.

어인 일인가. 이번엔 아무리 반복해도 같은 구성으로 마무리되는 씬 넘버의 배열을 보며 정말 이게 완벽한 걸까? 라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다.

‘진심’이 없었다.

‘평론가들은 이런 시도를 참신하게 봐주겠지?’, ‘이렇게 만들면 어느 영화제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니까 상 좀 받겠네?’ 따위의 계산이 앞섰다는 얘기다. 영화를 보며 느꼈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내 영화를 보는 분들도 느꼈으면 하고 영화를 시작한 사람인데 어느 순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으니 좋은 작품이 나올 리가 있나.

평론가나 영화제 관계자가 보라고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일반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를 원했던 것 뿐인데...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본다는 건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 ‘감상’이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 분석하고 비평하는 하나의 작업에 불과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겐 감동을 주겠다는 것인지.

이후엔 그동안 답답했던 집필 작업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회의도 그저 즐겁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정작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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