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계단을 오르며

입력 2023-10-04 05:00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계단을 올라왔는데, 앞을 보니 또 다른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다. 휴~ 긴 한숨이 나오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하지만 올라온 것이 아까워 다시 계단에 발을 올린다. 오르고, 쉬고, 오르고 쉬고, 한참을 올라온 것 같은데 표지판에 새겨진 거리는 줄어들 줄 모른다. 행여 하산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정상까지 도착할 시간을 물어보련만 새벽 등반이라 그마저도 어려웠다.

다시 주저앉으려던 순간 뒤쪽에서 반가운 발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남자분이다.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치려다 뒤를 보며 웃음을 띤 채 한마디 던진다.

“등산은 초보신가 봐요. 힘드시죠. 그래도 30분만 더 오르면 정상이니 힘내세요.” 그리고 내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보폭까지 줄여가며 내 속도에 맞춰주신다. 느린 발걸음으로 둘이 두런두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힘든 줄도,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 왔네요. 저기가 정상입니다.” “벌써요?” 아쉽다는 내 대답에 빙긋이 웃던 그분은 샛길로 빠지며 손을 흔든다. 더 높은 산까지 오를 모양이다. 정상에서 맞는 시원한 바람은 그간의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2차 병원의사인 내가 주로 만나는 환자분들도 이처럼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초보 등산객과 비슷하다. 반복되는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 약을 써도 좀처럼 호전을 보이지 않는 만성 폐질환 환자, 그리고 기약 없이 간이식을 기다리며 합병증으로 고통받는 간경화 환자.

완치라는 정상을 향해 계단을 한 걸음씩 밟아 가지만 그 앞엔 또 다른 가파른 계단이 버티고 있고, 반복되는 재발과 기약 없는 치료에 ‘정상이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영영 정상에 오르지 못할지도 몰라’라며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분들.

그런 환자분들을 위해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많은 시간 고민해 보지만 답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등산을 통해 풀어갈 방법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힘든 이들을 위해 내 곁을 조금 더 내어주는 것, 바쁘게 걷던 내 속도와 보폭을 줄이고 환자들과 같이 발을 맞추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도달할 정상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이것이 힘든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을 위해 최적의 치료와 더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밤을 꼬박 새운 천식 환자 한 분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청진기를 가슴에 댄다. 그리고 청진기를 통해 전해오는 그의 아픔을 느낀다.

“어젯밤 많이 힘드셨죠? 곧 좋아지게 해 드릴게요. 조금만 버티고 힘내세요.”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 원장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kt 위즈, 새 역사 썼다…5위팀 최초로 준플레이오프 진출
  • '흑백요리사' 요리하는 돌아이, BTS 제이홉과 무슨 관계?
  • 뉴진스 민지도 승요 실패…두산 여자아이돌 시구 잔혹사
  • 尹대통령, 6~11일 아세안 참석차 필리핀‧싱가포르‧라오스 순방
  • 건설업계·부동산 전문가 75% "서울 아파트값 계속 오른다"…지방은 상승 "어려워"
  • 일본 신임 총리 한마디에...엔화 가치, 2년 만에 최대폭 곤두박질
  • 외국인 8월 이후 11조 팔았다...삼바 현대차 신한지주 등 실적 밸류업주 매수
  • “대통령 이재명”vs “영광은 조국”…달아오른 재보선 [르포]
  • 오늘의 상승종목

  • 10.02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81,995,000
    • -0.29%
    • 이더리움
    • 3,168,000
    • -2.97%
    • 비트코인 캐시
    • 427,900
    • +0.59%
    • 리플
    • 704
    • -9.63%
    • 솔라나
    • 183,500
    • -5.8%
    • 에이다
    • 456
    • -1.72%
    • 이오스
    • 623
    • -2.35%
    • 트론
    • 211
    • +1.44%
    • 스텔라루멘
    • 121
    • -3.2%
    • 비트코인에스브이
    • 59,450
    • -2.22%
    • 체인링크
    • 14,270
    • -0.83%
    • 샌드박스
    • 323
    • -2.42%
* 24시간 변동률 기준